[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칸이 사랑한 거장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데뷔 후 첫 도전한 미스터리 장르를 통해 관객들의 감각을 휘저어놨고, 암담한 시대 젊은이의 무력한 표정에 점화를 시도했다. 이창동 작품의 신세계가 열렸다는 평가는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은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종수는 소설가가 꿈이지만 뭘 써야 할지조차 모르는 유약한 청춘. 행사장의 댄서로 일하는 해미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리틀 헝거'가 아닌 삶의 이치를 깨닫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다.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살며 고급 스포츠카를 모는 벤은 일상의 따분함에서 벗어나는 게 주된 관심사다.


   


세 인물의 온도 차는 그야말로 극명하다. 살껍데기를 무심히 드러내며 그 고혹성만이 무기일 것 같던 해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눈물로 적신 날갯짓을 하고, 한국의 개츠비 벤은 매사에 진지할 필요 없다며 음악의 베이스를 키운다. 종수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없이 비틀거린다.

모종의 삼각관계로 만나는 해미, 벤, 종수의 얼굴에는 각각 이상을 향한 갈망, 부유성과 향락, 방황하는 자아가 흐른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얽히면서 빚는 사건들은 종착역에 다다라 강렬하게 타오른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 그간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선 인물의 감정이 어떠한 사건이나 결과물로 귀결되지 않았다. 인물이 어떤 격정적인 변화를 겪든 주변의 삶은 그대로 흘러갈 뿐이고, 문제를 구태여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물에게 더욱 이입할 수 있었고, 문제 너머의 의미를 곱씹기에 참 맛스러웠다. 이창동 감독 작품의 상징과 정서는 그렇게 대중의 가슴에 촉촉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큰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버닝'은 벤을 만난 뒤 다양한 사건을 겪은 종수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방점을 찍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이창동 감독은 무겁게 내려앉는 긴장과 청춘의 무력한 표정을 통해 화염처럼 터질 분노를 쌓아나간다.

세 인물의 배경과 관계가 미스터리한 만큼 서스펜스적 요소도 상당하다. 알 수 없는 말만 내뱉는 것 같던 해미의 속내와 도무지 감 잡을 수 없는 벤의 눈빛, 현실과 메타포를 구별하기 힘든 이들의 대화가 연신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일련의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긴장을 돋우는 영화음악은 놀랍도록 몰입감 넘친다. 2018년 가장 강렬한 영화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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