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리비아 식 핵폐기’를 주장하던 미국이 17일 ‘트럼프 식 비핵화’로 말바꾸기까지 하루가 안 걸렸다. 북한이 유독 ‘선 비핵화 후 보상’의 이른바 리비아 식 해법을 언급한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집중 비판한 직후 보인 미국의 조치이다.

앞서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영구적인’(Permanent)이 포함된 PVID를 언급했다가 지난 9일 두 번째 방북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 이후 다시 CVID로 바꿔 말한 일도 있다.
 
북미 간 ‘세기의 담판’을 앞두고 미국은 일단 두 차례 북한의 공개적인 반발을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즉, 북한과 미국이 신속한 비핵화 합의를 위해 공개적으로 협상에 돌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미 정상이 마주앉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을 준비할 양측 실무진들의 협상이 본격화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에 대비해 북한은 미국의 뜻대로 호락호락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양측의 사전 기싸움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문제는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뤄 자신감을 되찾은 북한이 예전에 보이던 강온전략을 구사하며 ‘변심’을 드러낸 것으로 앞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꺼내들 협상 카드가 무엇일지에 따라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이번 발표를 되짚어보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남북 고위급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며 한미연합공중훈련을 비판했다. 이어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의 담화 발표로 미국이 준비해온 리비아 식 비핵화에 정면 반발했다. 

16일 북한의 남북회담 무기한 연기 발표가 있자 대부분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한미군사훈련을 이해한다던 김정은이 왜 말 바꾸기를 했나 배경 분석에 분주했다. 한미연합공중훈련인 맥스선더 훈련은 이미 11일부터 시작됐지만 북한은 다음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의식에 남한 기자들을 초청한다고 발표했으니 돌발적인 변수가 있을 것이란 짐작은 당연했다.

하지만 북한이 실질적인 협상에 돌입하면서 속내에 감춰뒀던 진짜 비핵화 조건을 꺼내든 것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북한이 발표한 말 그대로 풀이해보자면, 사상 초유의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북한은 일단 결과가 나올 때까지 ‘통미봉남’할 수 있다. 그리고 협상장에 앉아 비로소 미국에 한미군사훈련 중단 카드를 제시할  수 있다. 또 리비아 식 핵폐기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약 미국과 협상이 결렬될 때 중국과 경제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미국과 벌일 협상안 마련에 골몰할 시간에 친선 참관단을 꾸려 장기간에 걸쳐 중국 산업현장들을 집중 시찰하는 일정을 병행하고 있다. 자연히 자신들의 핵폐기에 따른 미국과 중국의 보상 경쟁을 부추긴다는 해석이 나온다. 북중 간 경제 당국자들의 교류가 진행되며 중국의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설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중국처럼 공산당이 정치를 독점하면서도 시장경제 요소를 대거 받아들인 모델로 개혁개방의 방향을 틀 가능성도 높아진 것이다. 이럴 경우 북한은 남한과 미국과의 대화는 군축회담에 한정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가장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번에 북한은 판문점선언을 언급하며 남한에 반발했다. 앞으로도 북한이 절대 호락호락 말려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김정은 정권은 그동안 미국과 적대관계였지만 중국과도 냉냉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향후 비핵화 협상을 미국이 아닌 중국과 벌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준비해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사실 김정은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분위기가 무르익던 지난 3월 26일 전격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첫 번째 북중정상회담을 가졌을 때부터 이미 북한은 ‘핵폐기 카드를 쥐고 남북미중이라는 4자 구도를 형성해 협상력을 올리려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당시 CNN방송은 “역내 ‘피스 메이커’를 노리는 중국이 한반도 위기 해법으로 ‘쌍중단’(雙中斷·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동시 중단)을 제안해온 상황에서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쌍중단 또는 그와 유사한 비핵화 로드맵을 제시할 경우 미국 입장에서는 ‘허가 찔린 격’이 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폐기에 따른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보상은 필수적이고, 미국이 가령 맥도날드 평양점 허용 정도로 그쳐선 중국과의 보상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사실 미 정부가 북핵 폐기 보상과 관련해 “민간투자 허용”을 언급했을 때 가장 먼저 맥도날드 평양 입점이 거론됐지만 이는 기업투자 허용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 이외에 북한으로서는 당장 얻을 것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공약했으나 방법에 있어서 미국과 의견차가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받을 요량이라면 완전한 핵폐기를 요구하되 통 큰 보상이 필요해진 것도 사실이다. 

북한은 핵폐기 이후 경제개발을 속전속결로 하고 싶어한다는 말이 있다. 이럴 경우 중국처럼 수십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경제개발을 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의 장점인 첨단과학기술 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경제개발로 단계를 뛰어넘게 지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럴 경우 행동 대 행동으로 비핵화 단계를 밟다가 한가지라도 이행되지 않을 경우 안전핀을 뽑아버리는 식의 ‘보상 유예’ 장치를 걸어놓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지금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내는 협상을 추진해야 할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북미간 신뢰구축이 동반되는 협상이 안될 경우 이번에도 ‘비핵화 쇼’에 불과한 결말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해본 사실이기 때문이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좌)과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