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론 정반대로 비틀고, 인적자본 등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반대로 비튼 것
- 기업가정신, 기술혁신과 신발명품의 등장, 개인의 운과 선천적 자질에 대한 이해부족
- 인적자본, 휴먼캐피탈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피케티
- 최고소득계층과 최저소득계층의 괴리에 초점을 두어, ‘증오’를 조장하고 ‘부’를 파괴하려는 피케티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23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피케티 열풍에 자유주의자가 답하다>라는 토론회에서 지정토론자로 발언하고 있다.

■ ‘월가 시위’와 피케티 ‘21세기 자본론’

‘월가 시위’는 반(反)자본주의 정서를 대변한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자본주의 타락’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월가 시위를 촉발시킨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자본론’도 예견된 것이다.

하지만 천착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월가 시위’는 2011년 10월에 일어났는데, 이는 ‘리만브러더즈’ 파산(2008년 10월)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하면 3년이 흐른 뒤이다.

뉴요커들이 분노한 것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금융회사들의 최고경영자(CEO)가 보너스 파티를 벌였기 때문이다. 미국 부실기관 구제금융제도(TARP)의 지원을 받은 주요 8개 기관 CEO의 평균 보수액은 2007년 2,740만달러, 2009년 2,070만달러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이후에도 CEO 평균보수는 사실상 줄지 않았다. 뉴요커들은 “금융기관 CEO가 위험을 ‘사회화’하고 이득을 ‘사유화’했다”고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고용부진도 뉴요커들을 화나게 한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 <피케티 열풍에 자유주의자가 답하다> 토론회 전경 

‘월가 시위’가 ‘1:99’의 프레임을 설정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를 공격한 것으로 미국의 소득분배 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월가 시위는 빨리 진정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시위대가 “우리는 99%다”를 외칠 때 “우리는 53%다”를 외친 ‘연방세 납세자’의 자발적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하고, ‘99% 측’(월가 시위대)과 달리 '인증샷'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주장을 펼쳤다. 당시 익명에 의존하지 않는 당당함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미국은 기회의 나라이지 보장(guarantee)의 나라는 아니다”라고 포스팅했다. ‘내 인생이 나아지려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월가 시위대의 주장과 ‘내 인생은 내 것이다’라는 보수적 입장이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자립과 근로’의 우파적 가치가 균형자 역할을 한 것이다.

월가 시위의 요지는 미국의 소득분배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미국의 소득분배가 극단적으로 불균형적인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소득분배의 장기 시계열 추이를 살펴보면, 지난 60년간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횡단면적으로 그리고 시계열적으로 증폭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소득 계층의 소득이 절대적으로 감소해서 소득 불평등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모든 소득 계층의 소득이 추세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그 증가율이 달라 소득불평등이 확대된 것이다.

■ '21세기 자본론'의 핵심 요지 및 인식오류

‘21세기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반대로 비튼 것이다. 21세기 자본론의 논지는 명료하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항상 앞지르기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수익률이 종국적으로 줄어들어 자본주의가 멸망할 것’이라는 ‘자본론’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부의 평등 분배는 요원하기 때문에, 피케티는 저서에서 고소득자와 자산가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글로벌 차원에서 자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피케티의 인식오류는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는 자본은 자동적으로 소득을 창출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자본에 대한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 자본가들로의 소득 및 부의 쏠림현상이 가속화된다는 것인데, 이 같은 현상이 300년 동안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자본소득은 자본스톡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했다. 이는 자본스톡의 가치는 주어진 것이고, 자본소득은 파생적이라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본은 경제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때 비로소 자본가치를 가지며, 수익이 없으면 자본의 가치는 영(零)이 된다.

이는 “자본스톡이 소득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창출될 때 비로소 그 소득의 원천으로 자본스톡이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피케티는 “죽은 자본에 혼을 불어 넣는 기업가정신”을 간과한 것이다.

2.
둘째로 소득창출과 소득분배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피케티는 분배를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본다. 이 같은 해석은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소득창출과 분배의 관계’에서 분배가 독립변수 일 수 없다. 분배는 생산된 것을 나눌 뿐이다. 물론 나누는 양태가 생산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이는 ‘환류효과’(feed back)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소득(GDP)은 말 그대로 ‘부가가치’의 합이다. 국민소득은 기본적으로 창출(부가가치의 합)된 것으로,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김서방이 돈을 벌어 최서방이 돈을 못 벌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경제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술혁신과 신발명품의 등장이다. Wall Street Journal은 “1870년에서 2007년까지 미국경제는 연 2.1%씩 성장했는데, 이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혁신의 물결)”에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말이 마차를 끌듯이, 생산되어야 분배할 것이 생긴다.

경제는 positive-sum game으로 다른 계층의 희생 없이도 전체 계층의 절대적 자원크기가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물론 특정 계층의 ‘소득점유율’이 높아져, 결과적으로 다른 계층의 점유율이 떨어질 수 있다. 이는 ‘점유율의 합’이 일종의 ‘캡’으로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소득 점유율이 낮아졌다고 그 계층의 삶의 질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소득에 정책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 정부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은 절대적 소득-빈곤의 문제이다. 사회 구성원의 소득분포 구조는 정책목표가 될 수 없으며, 빈곤은 별도의 사회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그 대안이다.

소득은 상당정도 ‘운과 선천적 자질’에 의존한다. 이는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결과적 불평등에 대해 ‘정의롭다 아니다’를 평가하는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다만 계층별 소득분배는 ‘추적조사’에 기초해야 한다. 특정시점의 상위 1% 구성원은 늘 바뀐다. 이 같은 현상은 기업을 보면 더욱 뚜렷해 진다. IMF외환위기 당시의 30대 재벌기업 리스트를 현재 30대 리스트와 비교해 보면, 시장의 역동성을 읽을 수 있다.

3.
피케티 세계에서는 ‘인적자본’(human capital) 개념이 실종되었다. 자본에서 노동을 완전히 분리시킨 것이다. 하지만 노동과 자본은 보완적이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생산직 근로자의 임금이 높은 것은, 노동자 1사람이 일 년 동안 생산한 자동차 대수가 과거에 비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결정적으로 ‘시설과 장치’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자본투자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때문에,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은 반드시 갈등적이지 않다. 자본가 계층이 노동자 계층의 실질 임금이 올라가도록 도운 것이다.

■ 우리나라의 소득분배 양태

실질경제성장률과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측정한 지니계수의 관계를 아래 그림으로 나타냈다. ‘전국(1인 및 농가포함)’ 소득분배 지표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겠지만 2006년부터 통계가 작성돼 시계열을 확보할 수 없음으로 인해, ‘도시(2인 이상 비농가) 지표’에 기초했다.

   
▲ 경제성장률과 시장소득기준 지니계수 추이 

20년간 소득분배는 추세적으로 악화되었지만 그 안에는 경제성장률에 따라 “소득분배가 급격히 개악되고 개선되는” 작은 파동이 존재하고 있다. IMF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회복기에는 예외 없이 소득분배가 개선되었다. 이로써 장기적으로 그리고 단기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지면 소득분배는 예외 없이 악화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실질경제성장률과 ‘시장소득’ 및 ‘가처분소득’ 기준 중산층 비중의 추이를 살펴보면, 가처분 소득을 기준으로 한 중산층 비중은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중산층 비중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는 소득재분배 효과에 기인한다. 이러한 재분배 효과는 2000년 들어 가시화되고 있다. 시장소득 및 가처분 소득을 기준으로 한 ‘중산층 비중의 차이’가 2000년 들어 점차 커지고 있음에서 유추할 수 있다.

■ 피케티의 비현실적 정책제언

경제성장은 동태적인 과정이며, 불균등을 수반한다. 이는 기술혁신 자체가 일종의 외부충격이며, 기업가정신도 ‘깨어있는 경각심’으로 소수에게만 있는 희소자원이기 때문이다. 성장은 긴 시간으로 볼 때, 불균등을 수반한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모든 계층의 절대적인 소득수준과 ‘삶의 질’은 개선된다.

최고소득계층과 최저소득계층의 괴리에 초점을 두는 것은 ‘증오’를 부를 위험이 있다. 불균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장의 엔진을 제거하는 것이다. 형평과 평등을 강조해온 사회주의 실험이 왜 실패했는가를 반추해야 한다. 따라서 성장페달을 밟되, 빈곤계층에 대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조합이다.

피케티는 지구 곳곳에 대해, 시계열적으로 300년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분석했다. 하지만 통계처리 오류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론은 지나치게 상식적이다. 예컨대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불균등을 완화했다는 식의 해석이 그 전형이다. 이는 “문명사적 조망이 결여된 완벽하지 않은 실증분석”으로 보는 것이 맞다.

피케티의 제안은 불평등의 심화를 막기 위해, 최고소득구간에 대해 80%의 소득세율을 부과하고 국가 간 과세자료 공유를 통해 높은 세율의 자본과세를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는 ‘부’를 파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