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다", "아니다" 70년대 노동현실 둘러싸고 설전
역사는 박정희의 승리 증명…우상과 이성 구분할 때
   
▲ 조우석 언론인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오래 굳어진 신념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내 글은 신성불가침의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의식화의 스승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1977년) 서문에서 그런 요지로 말했는데, 이후 40여년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좌파가 문화권력-지식권력을 쥐었고, 그 바람에 옛 우상을 깨려했던 이성이 새로운 우상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다. 좌파의 정신적 대부 함석헌, 노동운동의 성자(聖者) 반열의 전태일, 그의 평전을 쓴 민변 창립자 조영래, 문화권력의 황제 백낙청 등은 그 일부다. 건강한 사회, 다양성이 살아있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우상의 빛과 그늘은 구분해야 옳지 않을까?

그런 차원에서 함석헌 신화를 깨는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지만,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려 한다. 첫 논의가 미진했던 탓인데 차제에 지금까지 쟁점으로 남아있는 노동문제를 점검해보며, 그걸 둘러싼 박정희 대통령과 김 추기경 사이의 74년 청와대 논쟁도 조명해볼까 한다.

지난 주 밝혔듯 67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가톨릭에게 중요하다. 가톨릭이 대사회적 발언을 한 첫 계기이고, 당시 김 추기경이 가농(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의 직함으로 노동자의 인권 옹호를 위해 사건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즉 심도직물이란 회사에서 노조를 설립하려는 노동자 움직임을 부당한 방식으로 막지 말라고 주교단 성명을 통해 밝혔다.

당혹스러운 건 김 추기경의 현대사 인식이다. 그의 자서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런 한계가 속속 드러난다. 60년대 당시 막 시작됐던 산업화가 "농촌 희생을 전제로 한 정책"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 탄압"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건 일례다. 한강의 기적이 "권력에 의한 강요된 희생"이란 식의 표현이 자서전을 관통한다.

약자를 품어주려는 종교 지도자의 태도이겠지만, 사안이 간단치 않다. 심도직물 사건은 3년 뒤에 발생한 전태일 분신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게 우선 궁금하다. 전태일 사건에 가톨릭이 개입한 증거는 없지만, 개신교 쪽에서 움직인 건 거의 분명하다. 그러 이유로 심도직물 사건은 평화시장 전태일의 귀에 즉각 들어왔을 것이고, 분신에도 일정한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런 추정은 60~70년대 노동운동에서 가농과 도산(도시산업선교회) 등 기독교 좌파의 입김이 막강했다는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 꾸며진 얘기이며, 분신 사건 전후 전태일에겐 기독교 좌파 운동권이 깊숙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 1979년 11월 2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례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추모 미사. /사진=연합뉴스

그게 류석춘 교수의 책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기파랑) 곳곳에 등장한다. 어쨌거나 노동운동사에서 가톨릭의 입김은 무시 못하지만, 그래서 되물어야 한다. 심도직물 노동자나 전태일 등 60~70년대 노동자들이 김 추기경의 말대로 희생을 당했고 "상상 못할 노동 탄압"의 대상이었나? 이 질문은 가톨릭의 현실 개입이 정당했던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사회적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한 김 추기경의 행보가 올바른 것인지, 노동입국의 꿈을 향해 돌진했던 박정희가 옳았는지 여부도 판단할 수 있다. 다행이 우리 손엔 데이터가 있다. 그걸 근로자 전태일에 국한해 보자. 16살 나이학력도 없이 직장을 찾는 그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줬다.

평화시장 재단사 취직 뒤 분신자살 6년 동안 그의 월급은 무려 15배 올랐다. 그건 당시 평균소득(1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에 해당하는데, 그런 소득은 약간의 편차를 고려해도 다른 노동자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강화도 심도직물 사람들도 마찬가지란 얘기다. 이게 뭘 말해주는가?

"상상 못할 노동 탄압"의 박정희 시절이 외려 유토피아였다는 뜻이다.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노동자 보호 장치가 허술한 건 당시 시대의 한계일 뿐, 그게 박정희 시절 매도의 근거가 될 순 없다. 외려 정반대다. 대졸 백수가 수두룩하고, 취업해도 임금은 오르지 않는 현 상황에 비춰보면 60~70년대는 가히 천국이었다. 민간 부문만이 아니라 공무원 봉급도 초고속 인상됐다.

공무원 처우개선 5개년계획에 따라 1966년 30% 인상을 시작으로 67년 23%, 68년 30%, 69년 30%, 70년 20% 인상을 단행했다. 당시 한국사회 전체가 얼마나 활력 넘쳤던가를 보여준다. 이런 객관적 데이터 앞에 김 추기경의 노동관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정치-종교 갈등이 빚어졌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가농과 도산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게 대통령과 추기경 사이의 설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종교가 왜 노동문제에 개입합니까? 개신교의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개입하면 공장이 도산한다고 아우성입니다."(박정희)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김수환)

거의 반세기 전 가시 돋친 대화는 지금 보면 누가 옳았는지가 너무도 분명하다. 지난 글에서 나는 밝혔다. 박정희 시절은 연평균 9%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9배 증가했다. 성장속도만이 아니고 질과 양을 함께 달성했는데,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됐다.

그래서 진정 위대한 동반성장의 시대였다. 그걸 김 추기경은 몰랐으며 박정희의 드라이브를 방해했다. 그런데도 지금 평가는 완전 딴판이다. 한강의 기적이 "권력에 의한 강요된 희생"이라고 단정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앙 받고, 박정희 대통령은 노동자 착취는 물론 정경유착과 독재의 대명사로 취급 받는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김 추기경에 대한 호평은 명분 좋아하는 한국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우상으로 발전하고, 현실인식을 막는 요인이 된다. 차제에 보다 냉정하게 말하자. 김 추기경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닮은꼴이다.

김영삼의 경우 민주화 대통령으로 일부 추앙 받지만, 실제론 좌파운동권 등장을 위한 숙주(宿主)였다.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운동권이 청와대를 포함한 제도권에 대거 유입된 배경에 김영삼이 있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즉 그는 좌파에 레드 카펫을 깔아줬다. 그런 부류는 좌익에 관용적인 위선적 리버럴리스트로 분류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송구스러운 지적이지만, 김 추기경도 그런 혐의가 없지 않다. 그러니까 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됐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지금 정의구현사제단 때문에 가톨릭이 몸살을 앓지만, 이런 사태의 원인제공자 중에 김 추기경 이름이 빠질 수 없다. 우상과 이성을 구분하는 분별지(分別智)를 지금이라도 발휘할 필요성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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