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적 편집’이 형성한 여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 친일반민족 프레임이라는 집단 감정의 탓

‘세월호 참사’에 이어 ‘문창극 총리 후보자 사퇴’는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는 총리 후보로 지명되자마자 ‘친일ㆍ반민족’의 낙인을 받았다. 한 방송사가 그가 속한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70분 행한 강연을 2분 분량으로 편집하여 그를 ‘친일ㆍ반민족주의자’로 규정하였다. 결국 그는 사퇴하였다.

   
▲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이를 두고 ‘인사 참사’, ‘악마의 편집’, ‘인격살인’, ‘진실을 외면한 보도’, ‘표퓰리즘’ 등 다양한 말들이 쏟아졌다. 이 사태을 표현하기 위해 “잇단 ‘총리 낙마’…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여론 재판에 봉쇄당한 인사청문회”, “문창극 사퇴 … 민주주의 숙제 던지다”, “문창극 퇴장과 민주주의의 시계” 등 다양한 표현들이 동원되었다. 어떤 기자는 이 사태를 민주주의, 합리 및 이성과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를 준수하는 데 있다. 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 동의는 헌법에, 인사청문회는 법률에 명시된 의무이자 권리이다. ‘악의적 보도→일부의 선동→야권의 무차별 공세→여권의 부화뇌동…후보자 자진 사퇴’의 촌극이 벌어진 지난 15일간 우리 정치권에 합리와 이성은 없었다.”

후보자 자신도 “언론의 생명은 진실보도입니다. 발언 몇 구절을 따내서 그것만 보도하면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의 사실 보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 보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기본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진실 보도입니다. 우리 언론이 진실을 외면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에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사실 보도’와 ‘진실 보도’를 구분하면서 ‘진실’을 외면한 언론을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조각난 사실’만으로는 ‘진실’이 될 수 없다. 전체 속에서 그것의 합당한 자리를 잡아주어야 비로소 진실이 된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언론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오도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는 우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책임 안 지는 SNS에 휘둘리는 나라’, ‘소통의 SNS가 소통 단절ㆍ여론 왜곡의 중요 통로로’, ‘거짓이 아무런 검증 없이 공론장 진입’과 같은 탄식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 사회가 거짓과 왜곡, 선동에 취약하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번 사태를 “일부 언론에 의해 오도된 여론, 이를 근거로 한 야권의 무차별 공격과 여권의 정략적 편승, 청와대의 무책임이 맞물려” 발생하였다고 단정하기도 하였다.

   
▲ ‘우리는 이성(理性)사회를 살고 있는가-문창극 후보자 사퇴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자화상’ 토론회 전경 

누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협하였는가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가장 심중하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악의적 보도→일부의 선동→야권의 무차별 공세→여권의 부화뇌동…후보자 자진 사퇴” 라인에서 빠져 있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로 국회에 임명동의요청안을 보내지 않았다. 그 다음 책임은 여권이고, 그 다음은 야권이고, 그 다음이 일부 선동과 악의적인 보도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한 방송사의 편집이 악의적인 여론을 조성하자 여기에 여야 정치권이 편승하여 청문회를 통해 후보자가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사퇴하였다는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한 방송사의 악의적인 편집이지만, 이것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의적인 편집이 형성한 여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악의적인 편집이 조성한 여론’이 수정되지 않고 결국 후보자의 낙마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일차적 책임은 해당 방송사에 있지만, 더 큰 책임은 정치권과 청와대, 나아가서 많은 국민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론사의 왜곡을 정치권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통령이 임명동의요청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과 청와대는 악화된 여론 때문에 청문회를 열 수 없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의 핵심은 ‘거짓된 여론’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자유이다. 언론의 자유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단순 다수결주의와는 구별된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와 그것의 연장인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옹호된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합당한 이유가 없는 간섭은 허용될 수 없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합리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오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좀더 믿을 만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절차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개적 토론이 합리적 절차이다. 토론의 자유와 개방적인 의사 교환이 없다면 우리는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는 오류의 수정과 진리의 인식을 위해 필요하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밀은 “인간 사회에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상대방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라는 자유의 원리를 제시했다. 밀은 “이 원리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미개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이 대상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밀은 미개인들을 개명시키기 위해서는 독재도 정당화된다고 생각하였다.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체적 나이를 먹은 뒤에도 미성년 상태에 머무는 것은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두려워한다. 그냥 남의 판단을 따라간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계몽이전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악의적인 여론을 여과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발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과학 기술의 성과는 누리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합리화시키는 과학 정신은 미흡하다. 과학 정신은 합리성, 비판성, 자율성, 개방성, 보편성, 엄밀성을 따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집단 감정에 좌우되는 사회이다. 건국 6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반민족’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도 집단 감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창극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왜 이런 사태를 되풀이하는가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권, 그 다음은 언론에 있지만, 정치권과 언론이 아무런 직업윤리나 책임감 없이 제멋대로 난동을 부릴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 것은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압축적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키워내지 못한 ‘진실에 대한 존중’과 ‘과학 정신’이 집단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단계까지 성숙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