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현실적인 사랑의 틀, 배타적 민족주의와 선 그어야

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5) -계급주의, 지역주의 넘어 민족주의로 국민통합해야

민족주의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북한의 남침, 남북분단 상황 등...민족주의와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갈등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만드는 핵심용어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본격 발현된 자유주의는 서구의 근현대사를 추동한 핵심 키워드였다. 자유는 천부인권, 사유재산보호와 함께 서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주의, 전체주의, 사유재산권 부정 등으로 인류사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준문대학원 교수
7월 1일부터 일본의 아베 내각은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하고 힘의 외교를 하겠다고 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지만 북한에 대한 후견인역은 변함이 없다. 샌드위치의 우리는? 한반도 8천만 사이에 여전히 철지난 계급주의(階級主義)와 이기적인 지역주의(地域主義)가 득세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지닌 약소한 힘을 팍 좀먹는 계급주의와 지역주의다. 계급주의와 지역주의가 구태(舊態)임을 알면서도 여전하다. 이 어두움을 민족주의의 넓은 사랑으로 몰아내자.

첫째, 계급주의를 보자. 계급주의는 사회 내 계급간 갈등투쟁을 통해 부를 나누자는 것이다.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어 싸워 쉽게 가지고 편히 살자는 유혹은 대중을 홀린다. 흘린 땀에 관계없이 모든 재산을 똑같이 나누거나 식량을 배급제로 하자고 달콤한 사탕을 내민다. 김일성이 조선 인민을 사랑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었다고 선전한 그대로다. 인간 본성에 도저히 맞지 않는다. 배급제로 하자고 하면 누구든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결단과 창조적인 활동 자체를 막는다.

그에 반해, 민족주의는 매우 현실적인 사랑의 틀이다. 우리가 민족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욕구하는 것은 그 사랑만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놓여진 두텁고 차가운 벽을 녹여내리는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민족주의는 반 FTA와 연결될 수 있다. 세계화, 선진화에 역행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배타적‧저항적 민족주의만 염두에 둔 탓이다.

민족주의는 좌(左)의 이데올로기와도, 우(右)의 이데올로기와도 결합할 수 있다. 즉 중성적(中性的) 존재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민족주의라는 에너지를 우(右)로 결부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계급성으로써 민족 내부에서 헐뜯고 싸우는 좌(左)의 이념보다는 대외적으로 번성·영광을 구가하는 우(右)의 방향이 훨씬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에 일부 선각자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계급사상에 기운 바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마저 한 때 민족주의와 저항적 ‘계급’(민중)사상의 결합을 시도한 적이 있다. 식민지 시대에 민중적(저항적)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은 당시 암담한 사정을 생각할 때 이해는 된다. 그러나, 민족의 현실을 개선하려면 사후구제적, 저항적, 계급적 민족주의보다 사전예방적, 진취적, 포용적 민족주의가 훨씬 낫다.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계급문제와 가장 결합하기 쉬웠던 때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좌파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편협성을 알고 있었다. 해방 후 급기야 계급사상을 기초로 한 민족주의는 그 본색을 드러냈다. 이들은 민족의 분열을 부르고 전쟁을 일으켜 수 백 만의 동족을 살상했다. 좌파 민족주의 이념은 진정 민족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와 이를 선동한 지식인, 좌파 정권의 이익만을 위한 것임을 여지없이 보였다.

사실 깊이 보면 민족주의는 계급주의에 의해 부정된다. 이는 계급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한 국제공산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좌파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좌파와 결합하는 민족주의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지역주의 문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지역주의, 지역감정이 심하였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 동인‧서인간 분란이 있었다 해도 지배층 사이의 갈등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해방직후에도 지역주의가 이토록 심하지 않았었다. 예를 들면, 전남 광양군 출신의 조재천이 대구에서 경북지사와 3, 4, 5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부산 출신의 강성주가 목포에서, 경남 산청군 출신의 이필호가 전남 광주에서 3, 4, 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누가 정권을 담당하더라도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 정당성의 시비고리를 끊기 어렵다. 문민화된 정부에 대해 수많은 국민들이 기대를 걸고 영광스럽고 풍요로운 나라로 이끌 것을 바랐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우리가 직면한 큰 장애물은 바로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공룡이었다.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우리’ 대통령, ‘우리’ 국회의원이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적지 않은 유권자 군(死票집단)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대통령과 국회, 정당이 하는 일에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안티(anti), 비토(veto)그룹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떨어진다.

지역주의의 원인은 우리 사회가 근대화되면서도 촌락공동체의 잔재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럼에도 우리 지식인들은 국민통합의 원대한 포부를 실천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출신지역 위주의 지역주의에 매몰되거나 편승하고 말았다. 우리 사회의 구조는 1차집단에서 2차집단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었는데도 2차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마음의 고향’을 찾아주지 못하였다. 2차집단이 한국사회에서 점점 더 비중을 늘려갔음에도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중요한 이권(利權)의 귀속, 의사의 결정이 1차집단, 연고위주로 되어 국민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누구나 출신지역에 대해 애착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 본연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민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때는 합리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거나 타인이 선점한 고지를 탈취하려 할 때 혈연, 지연, 학연의 기반을 강화하려 한다. 어떤 그룹이 지역주의에 의한 이권배분, 의사결정을 하면 그 상대방 진영에서도 그에 대응하여 뭉치게 된다.

능력의 유무나 정책의 건전성을 따지기보다 같은 지역출신인지 아닌지를 우선적으로 따지려들면 사회전체가 활력을 잃는다. 이를 조절하는 방패망이 있어야 한다. 더 큰 단위의 생존경쟁 현실(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과의 무한 생존경쟁)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지역주의에는 언제나 자신의 지역에 대한 이기적 욕구가 숨어 있다. 이런 국가분열적 욕구, 욕망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정책의 우열로 승부를 걸게 유도해야 한다. 한 지역에 신공항을 유치하면 다른 지역에는 중요한 공기업을 유치하게 하는 등 균형발전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지역주의를 희석시키는 방안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요구를 다 들어주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지역이기주의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전국의 모든 지역이 다른 지역과 출혈경쟁을 해야 한다. 이권 나눠먹기는 너무나 소모적이다. 우리 민족의 역량을 소진하는 것이고 통일의 여건 마련에도 불리하다. 이런 일을 현실 정치가에게만 맡기기에는 현실정치가는 너무나 이욕적(利慾的)이고 타산적(打算的)이다. 지식인들이 나서서 막아내야 한다. 사실 지식인들조차 자신의 출신연고(지연)로부터 전혀 단절될 수 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현실적 이해관계가 적다. 그러니 소명의식을 지녀야 한다.

모든 국민들은 열정을 가지고 지역주의 타파에 힘써야 한다. 지역주의보다 민족주의가 더 많은 행복을 기약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작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이익보다 민족단위의 이익이 훨씬 크고 지속적이며 안정적임을 보여야 한다. 즉, 민족주의라는 그릇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줌을 이해시켜야 한다. 지역색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유용한 탈색제(脫色劑)는 민족적 요소를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지역주의의 상위 단계인 민족주의는 한반도 남단을 세분시키는 지역주의의 편협함을 막는 방부제(防腐劑)다. 또, 미시적인 ‘마을 단위’의 이익보다 거시적인 ‘민족단위’의 이익을 제시하는 밝은 빛이다.

우리나라의 동서 지역은 중세 유럽에서 나타난 동서 지역주의(1054년의 동서교회의 종교분리)에 비할 때 이념적,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관점에서 동질적이라는 점에서 아직 큰 희망을 준다. 비잔틴 시대의 동서교회 지역주의는 제국의 영토분할지배 정책, 제국의 법과 세계 관념론, 황제의 케사르주의와 로마 교황청의 신의 대리자론의 대립, 교황선출과 폐위에 관한 황제의 개입과 만국 종교회의 개최문제와 토론내용에 관한 황제와 로마 교황청간의 주도권 쟁탈, 교회 통합을 위한 이단문제처리에 대한 관점 차이, 성상파괴논쟁,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불가리아 영역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 등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에 비할 때 우리나라의 지역간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도 느낄 수 없다.

만약, 우리 대한국민이 모두 민족주의자로 된다면 혈연, 지연, 학연에 대한 1차적 충성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그 대신 한민족 전체에 대한 큰 애착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민족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온갖 부정부패와 불공정, 파벌의식, 지역감정을 멀리할 것이다. 그러니 국민통합의 사랑을 하려면 민족주의로 무장해야 한다. 계급주의와 지역주의를 넘어 민족주의의 넓은 사랑을 보일 때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