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이오스의 <변론>, 이성과 감성, 논리와 설득의 변론과 승소의 비결담아

박경귀원장의 행복한 고전읽기 (19) - 사실관계와 시민적 덕성을 중시한 변론 문화
이사이오스(BC 420?-BC 350?) <변론>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고대 그리스인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개개인이 자유에 대한 인식을 뚜렷이 하고 이를 현실의 삶에서 구현하려 애썼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자유는 남에게 예속 받지 않으려는 의지의 작용이다. 자유는 자신의 생각과 선호를 구현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소유재산에 대한 정당한 권리의 행사에도 투영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는 나와 가족, 나아가 도시국가를 지키는 가치관이자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이념 역할을 했다. 자유의 확보와 유지, 확대를 위해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수사학을 공부했다. 변론의 전문 교육자인 소피스트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사학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산물이자, 민주주의를 더욱 꽃피우게 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들의 자유의 무한정한 확대 시의 충돌을 치밀한 법률로 제어했다. 자연스럽게 법률 다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법정에서의 소송이 증가함에 따라 변론을 도와주는 전문가가 나타났다. 법정 변론가였다. 현대의 변호사와 유사한 역할이다. 이들은 논리적 주장에 미숙한 시민의 변론을 직접 대신하거나, 당해 도시국가의 시민이 아니어서 변론에 나설 수 없는 경우에는 원고 또는 피고의 변론문을 대작(代作)해 주었다.

이사이오스(Isaios)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대표적인 법정 변론가였다. 특히 그는 상속권에 관한 소송의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최고 사상가였던 플라톤과 쌍벽을 이루던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던 이소크라테스(Isokrates)의 제자였고,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스승이었다. 이는 이사이오스의 학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두상, BC 280년 경 그리스 조각가 폴리에우크토스(Polyeuktos)의 원작을 로마 시대인 2세기에 복제한 작품,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 Marie-Lan Nguyen

<변론>은 당대 아테네의 법률과 소송의 진행방식, 개인들의 권리 의식, 재산권의 상속에 대한 구체적인 법조항과 사회적 관습과 인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史料)다. 2400년 전에 그리스 법정에서 벌어지는 개인 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을 보면서, 현대 사회의 법률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론 경쟁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논리와 증거 제시, 감성적 설득의 수사에 감탄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법가 사상은 나왔다. 하지만 전제군주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상앙이나 한비자 등 법가의 학자들은 절대군주에 대해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중형주의(重刑主義)를 주장했을 뿐, 백성들이 삶 속에서 부딪히는 권리의 충돌을 해소하고 부당한 억압을 구제하고 조정해 주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통치자에 대한 조언만 무성할 뿐, 백성 간의 쟁송과 변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국의 고대기에 법률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쟁송의 과정이나 전문적 변론의 제도나 문화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법가(法家)의 주장은 여러 저술로 남았지만, 이들이 구상한 법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통치의 수단으로 제시된 법률이 어느 정도의 합목적성을 갖고 있었는지 조차 파악할 길이 없다. 더구나 각각의 법률이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해결 과정은 아예 알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재판 청구의 절차가 정립되고, 전문적 변론가가 필요할 만큼 시민들의 쟁송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문명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기초한 사회적 제도와 문화임에 틀림없다. 당대 최고의 법정 변론가였던 이사이오스의 변론은 아테네의 법률 체계와 소송 수준을 여실히 입증해준다. 변론에는 법률적 증명뿐만 아니라 수사학의 기법을 활용한 설득의 논리가 담겨있다.

이 책에는 이사이오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변론문 64편중 12편이 실렸다. 주로 상속권에 대한 다툼의 변론이다. 상속재산을 두고 상속의 우선순위에 대한 다툼이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상속과 관련한 다툼이 있으면 법정의 재판과정을 통해 상속자를 확정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에피디카시아(epidikasia)’라 불렀다.

상속권의 다툼 사례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상속자가 유언이 없이 죽었을 경우, 친족 간의 피상속인의 우선순위를 두고 다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양자(養子)와 부계 친족 간의 다툼, 배다른 형제 사이의 다툼, 동복이부(同腹異父)와 사촌 간의 다툼, 직계와 방계 간의 우선순위 다툼 등 다양하다.

피상속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쟁점이 되는 것은 사실관계와 정황 증거다. 즉 법률상의 상속의 근거가 되는 친족관계의 진위여부가 우선시된다. 법률상 자녀인지 사생아인지를 다투는 경우가 그러하다. 유언장의 존재 및 진위여부도 사실관계 다툼이 초점이다. 친족인지 확인이 불가능할 때 주변인의 증언이나 다양한 정황 증거들이 동원된다. 사자(死者)의 생존 시 얼마나 친밀하고 은혜를 입었는지도 유언의 존재여부나 상속의 의지 정도의 추정에 영향을 미쳤다.

변론의 사건들을 보면, 전혀 친족관계가 아닌 전쟁터의 전우가 자신이 사자(死者)의 유언을 받았다며 상속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법률적으로 완전하게 양자(養子)의 자격을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실질적인 양자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에선 탄생에 의한 친자의 등록이나 양자의 등록은 공식적으로 집안사람에게 소개하고, 형제단 및 촌락인으로 등록해야만 법적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 두 절차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는 늘 법적 분쟁의 소지가 되었다.

변론가들은 승소하기 위해 무엇에 중점을 두었을까? 우선의 사실관계의 증명이다. 유언장이나 유력한 친족의 증언, 기타 유리한 공적 의례의 사실 증거 등을 동원했다. 아울러 소송제기자의 주장의 신뢰에 의문이 들도록 과거의 부적절한 행적이나, 공공생활에서의 의무의 태만 등을 폭넓게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정황증거가 다툼의 논점이 되었을 경우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서로 많은 재산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상속 소송에서 소송제기자의 과거의 비행과 부도덕성은 배심원들에게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변론에는 소송제기자가 평소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즉 공적 의무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가를 입증하는 내용이 빠짐없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송당사자들이 연극공연에서 합창단의 후원을 얼마나 했는지, 세금은 제대로 납부했는지, 부유한 사람의 경우 주력 전선(戰船)인 삼단노선 운영을 위해 선원을 모집하고 항해를 지휘하는 일에 얼마나 복무했는지 등이 소송당사자들의 신뢰성 판단에 중요한 정황 증거가 되었다.

배심원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법률적 증거 못지않게 소송당사자들이 공동체에 기여한 정황 증거 또한 시민과 한 인간으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바탕으로 주장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존속에 기여하는 시민적 덕성 역시 재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이채롭다.

<변론>은 아테네가 시민의 재산권의 보호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상속 재산의 금액이나 내역들을 분석하면 당대의 경제적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또 재산권 다툼이 현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대변한다는 점에서 당대 아테네 사회의 풍속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민사소송의 변론집 이상으로 쟁송의 승리를 위한 증거의 발굴 및 입증, 판관과 배심원을 설득하는 논리를 보여준다. 상속권에 대한 소송은 물론 일반적 소송의 변호를 수행하는 현대의 변호사들과 쟁송과 관여되는 법조인들에게 유용한 읽을거리다. 특히 소송에 임하는 변론자의 가치관이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논변의 기법도 주목해 볼만하다. 변론집의 성격상 소송의 최종 판결문이 담겨있지 않아 논변의 승패와 결말을 알 수 없는 점은 아쉽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추천도서 : 『변론』, 이사이오스 지음, 최자영 옮김, 안티쿠스(2011), 3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