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감독당국, 인·허가 심사 기준 묻자 난색
”결정된 바 없으니 기준도 말 못해“ 찬바람만
IMF 때 국내 은행 철수 ‘주홍글씨’ 지우기 힘드네
금감원과 비공개 오찬서 "사무소 설립부터 해라"
[미디어펜=박유진 기자] "(인·허가 시기) 우리는 말한 적 없다. 아직 결정된 바 없으니 (심사) 기준에 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 주관으로 지난 20일 열린 태국 중앙은행 초청 세미나에서 현지 감독당국 관계자의 발언이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당시 세미나에 참석한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질의응답 시간에 A 은행 관계자는 ‘2021년도에 인허가가 이뤄지면 심사 기준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그 뒤로부터 태국 측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1997년 태국 외환위기(IMF) 당시 현지 정부의 만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내 금융사가 철수한 이력 때문인지, 태국 당국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한국 금융사에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 같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은행은 KB국민은행,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IBK기업은행, KDB산업은행 정도다. 

IMF 위기 이전까지 태국은 우리나라의 아세안 투자 진출 거점지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화자금의 급격한 유출로 태국에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태국 금융기관은 대규모 손실을 냈고 국내 투자자를 비롯해 외화 자본들은 자금 회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외국계 은행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는 KDB산업은행과 신한은행,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 정도였는데, 현지 정부는 외국계 금융사가 대거 철수하게 될 경우 국가에 더 큰 위기가 초래돼 사무소만이라도 유지해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지만 끝내 국내 은행들은 철수를 단행했다.

은행권이 글로벌 수익을 얻기 위해 '新남방정책' 등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2018년 태국에 진출시중은행이 한 곳도 없는 이유다.

이민환 인하대학교 글로벌금융학과 교수는 "당시 태국 정부는 해외 금융기관이 철수하면 국
가 신임도나 바트화에 부정적이라며 한국 금융사를 붙잡았지만 끝내 철수를 결정해 20년째 은행권의 진출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며 "이로 인해 태국 현지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들은 외국환, 수신업무 등에서의 금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외국계 은행이나 현지은행과 복합거래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가 '괘씸죄'로 현지에 진출하지 못하는 동안 태국 시장에는 일본 기업과 금융사들이 급속도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동남아시아의 금융시장 구조와 기업의 자금조달 형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금융사들은 태국에 사무소를 설치하거나 현지 은행과 업무제휴를 통해 거래 기업의 자금 조달을 돕고 있다.

소매금융인 리테일 대신 기업금융 위주로 자금 조달에 나서고 있고 국내로 치면 시중은행(도시은행)뿐만 아니라 지방은행까지 태국에 손을 뻗고 있는 실정이다. 2013년 11월 기준 일본 105개의 지방은행 중 54개가 태국 현지은행과 업무 제휴를 맺었다.

도시은행은 현지의 금융사 몇 곳을 인수해 영업하는 행태를 띄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츠비시도쿄UFJ은행은 태국 Ayuthaya은행을 매수했다.

이민환 교수는 "경제 침체와 고령화 등 장기불황에 직면할 때 지방은행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다보니 적극적으로 현지에 진출하게 된 것"이라며 "지방은행이라고 해도 국내보단 규모가 크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경쟁력이 높다"고 말했다.

또 그는 "태국은 금융 시장뿐만 아니라 산업 분야에서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형국이다"며 "일본이 태국 진출에 유리할 수 있던 이유는 기업 금융 부문으로 도요타처럼 글로벌 제조업체 등이 현지에 많이 진출해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의 경우 최근까지도 소비재를 빼고는 현지에 진출한 기업도 적을 뿐더러 '괘씸죄'까지 겹쳐 진출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금융당국은 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이번 세미나와 같은 교류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현지법인을 세우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진출을 하고 싶지만 만만치 않은 게 현 상황"이라며 "국내 금융사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재는 아예 개방조차 불가능한 상태이니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열기 위해 금융권이 함께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국내 금융사의 자국 진출 시 현지 금융사를 1~2곳 인수해 영업할 것을 인가 기준으로 내세우는데 태국 또한 비슷한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현지 법인 설립까지는 단기간에 승인하지 않겠다는 게 태국 측의 입장으로 지점 전환 또한 원치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무소부터 먼저 설치한 뒤 신중하게 진출을 고민해보라는 의견을 전달한 것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세미나 이후 태국 측에서 전한 입장은 한국계 은행이 진입하는 것도 좋지만 외국계 은행이 아닌 태국은행으로서 들어와 오랫동안 함께 가는 파트너십을 원했다"며 "법인이나 지점보다는 사무소를 내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변했고 시중은행 중에 이를 원하는 곳이 있다면 인가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박유진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