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우파정부 비판 경청을, 좌파와의 전쟁 리더십 발휘해야

박근혜대통령 리더십 해부(3)-사회전반의 지식정보 오염 정화(淨化)가 관건

지난 3개월 가까이 세월호 참사, 문창극 파동을 거치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離反)이 예측했던 것보다 빠르고,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법과 원칙이 사라진 떼법 천하의 사회, 민중주의(평등주의)에 함몰된 무책임한 지식인 그룹과 언론 집단이 뒤엉킨 복합위기의 국면이다. 이런 난맥상을 콘트롤할 정부는 기회주의적 좌우합작 정권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항구적 불안사회 대한민국의 구조와 변화 가능성을 짚어보기 위한 시도로 연속칼럼 ‘박근혜 리더십 연구’를 내보낸다. 칼럼은 ①박근혜는 정말 포퓰리스트인가? ②그는 박정희의 유산을 이해하는가? ③사회전반의 지식정보 오염 정화(淨化)가 관건이다 등 3회로 나눠 싣는다. 이번 회가 마무리다. <편집자주>

   
▲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자연인 박근혜, 정치인 박근혜의 궁극의 관심(ultimate concern)은 어떤 것일까? 세월호 사고 처리와 문창극 파동 당시 보여준 리더십은 실망스러웠는데, 여전히 애매한 그의 정치적 가치란 과연 무엇일까? 그걸 해독하기 위해 16년 전에 나왔던 수필집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부산일보)을 다시 읽었다. 오래 전 나온 이 책에 대한 대통령의 애착은 크다. 지난 해 6월 중국 방문 중 칭화대 연설에서도 이 수필집을 언급하며 “일생동안 추구하고 실천할 나의 작은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수록된 수필 48개는 그가 가장 외롭고 힘든 시절에 쓰여졌다. 육영재단 이사장만 맡은 채 대중들의 시야에서 멀어져있던 때였다. 즉 정계 입문(1998년 4월 재보궐선거) 직전 자연인 박근혜가 스스로를 단련했던 자기다짐과 마음공부의 기록으로 봐야한다. 눈에 띄는 건 수록된 수필 중 한국사회 현실이나 정치 현안을 다룬 건 단 한 꼭지도 없다. 그게 좀 아쉬운데, 대신 부모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 곳이 몇 곳이 된다.

여전히 모호한 채 뒤로 숨어있는 박근혜식 정치철학

대표적인 게 ‘봄꽃 속에 피어나는 부모님 추억’이란 수필인데, 봄날 옛 청와대 시절에 대한 회고는 수필집 전체를 통틀어 보기 드물게 서정적인 톤을 유지하고 있다. 생전 부모님은 꽃이 피어나는 봄을 가장 좋아하셨고, 머리 식히려고 잠시 집무실에서 나오신 아버지와, 갑사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어머니가 사진 찍으며 즐거워하시던 모습에 대한 감회가 그려진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켰던 분”이다.
 

부모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읽어지고, 자신의 정치철학도 그 연장선에 있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명료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게 전부이고,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실은 수필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붓다, 공자, 예수 이름과 함께 천도(天道), 하늘, 십자가 등의 용어가 수두룩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몫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인간의 운명이란 허무하다는 뜻에서 제목도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이다. 체념적인 운명론과 별도로 인간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연한 듯 강한 측면도 있다.

인문학적 너비와 깊이가 부족한 대통령의 수필 문장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인문학적 너비와 깊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렇다 할 경륜이 가늠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과학적 명료한 인식도 찾기 힘들다. 하늘에 대한 소명을 누차 강조하기 때문에 그가 자칫 나만이 진리라는 독선과 아집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대목이 우려된다. 그게 ‘진리 정치’의 위험성으로 연결되지 않을까가 걱정이 됐는데, 당혹스러웠던 건 세월호 대처와 문창극 총리후보자 지명 취소 사태에서 드러난 것은 전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무기력, 무소신, 소심함은 예기치 못했던 대목이다.
 

대체 자연인 박근혜, 정치인 박근혜의 궁극의 관심은 어떤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무늬만 우파정부, 기회주의적 약체정부라는 조롱까지 받고 있는 이 정부의 애매함 혹은 불투명함이란 혹시 대통령의 이런 멘탈, 즉 정치철학의 빈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아직 필자는 전여옥의 박근혜 비판을 믿지 않는다. 2년 전 이맘 때 전여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 전여옥의 대통령 비판

일테면 어느 행사 방명록에 글 한 줄을 쓰는데 10분을 고민하고 망설이는 게 박근혜 스타일이다. 지력(知力)도 좀 미지수인데, 한 번은 전여옥이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책장에는 통일성 없는 책들이 죽 꽂혀 있었고, 그걸 척 보는 순간 집주인 박근혜는 지도자가 될 사람으로서의 지적 능력과 순발력에서는 크게 멀었다는 중간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참조항목일 뿐이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순수함과 부모님에 대한 존경을 액면 그대로 일단 믿는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게 과연 충분한 것인가, 그런 존경을 지금 자신의 통치행위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그가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있다. 그가 아는 박정희의 정치철학이 좀 왜곡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지난 회에서 밝힌 대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5‧16과 유신에 대한 사과에서 보듯 좌파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데, 그게 박근혜 식 포퓰리즘의 뿌리로 판단된다. 그 진단이 과연 맞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 박근혜대통령은 우파적 철학이 흔들리면서 정권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좌파와의 전쟁에서 최고사령관으로서 좀 더 견고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박근혜대통령이 7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허창수 전경련회장, 박용만 상의회장 등 기업인들과의 회동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좌클릭사회의 오염에서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 개인의 지적 능력, 정치철학의 견고함 여부가 일단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목을 단정하기가 좀 힘든 게 사실이라면, 제3의 요인이 따로 있을 것이다. 즉 언론-대학-문화계를 포함해 한국사회 지식과 정보의 총체적 오염이 실로 위험스러운 수준이 분명하고, 이게 균형을 잃은 좌클릭 사회를 만들고 있는 숨은 힘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자신도 이 오염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필자는 그걸 내심 걱정한다. 사람들은 좌파 정부 10년이 온 사회의 좌편향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좌파의 문화권력은 1970년대 이후 한 세대를 훌쩍 넘긴다.

얼마 전 문제가 됐던 학교 역사교과서는 물론 한 해 쏟아져 나오는 4만 종의 단행본 출판시장도 심하게 왜곡됐고, 연극 영화 문학 등 거의 전 장르에서 지식정보의 왜곡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건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에 대한 조롱과 냉소, 그리고 건국 이후 지난 60여 년의 성취에 대한 폄하의 형태로 드러난다. 가히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지식정보 오염인데, 그건 이미 50~60대 성인세대까지 오도하기에 충분한 지경이다.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리라.

1970년대 한국은 군사정권 아래 숨죽인 병영사회?

일테면 그건 쏟아지는 단행본 중에서 얼마든지 눈에 뜨이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영화주간지 ‘씨네21’ 편집장 출신의 조선희가 쓴 영화 에세이집 <클래식 중독>(마음산책, 2009)을 들춰보자. 1950~80년대 옛 영화 이야기 사이사이에 현대사의 성취를 정면에서 부인하는 글이 꽤 자주 등장해 정상적인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저자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했던 영화감독 하길종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1970년대 한국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95쪽)이라고 단언한다. 영화 검열로 재주있던 한 작가를 망가뜨려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항변이다. 부분적으로 문제 제기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당시 1970년대 사회가 작가주의, 표현의 자유를 지향하는 감독은 물론 당시 한국인 모두에게 “군사정권 아래 숨죽인 병영사회”(88쪽)로 작용했고, 그 결과 폭발할 듯한 스트레스를 줬다는 식의 논리 비약은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는 물론 문학, 미술 등에서도 이미 보편화된 좌클릭

이런 서술이 과연 정상일까? 지식인 그룹 특유의 진보 강박증에 뿌리를 둔 냉소의 심리는 분명 도를 넘었다. 그런 뒤틀린 심리 구조에서는 건국 이후 네이션빌딩과 국가 동원 체제에 따르는 빛과 그늘을 함께 파악하는 균형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영화 에세이집 <클래식 중독>은 좋은 읽을거리이고, 썩 괜찮은 저술인데도 그런 식이라는 게 문제다. 그런 현상은 특정 저자의 편향이 아니다. 영화는 물론 문학, 미술 등의 장르에서도 이미 보편화됐다.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이런 매체와 작품에 노출된 젊은 세대가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리가 없다. 나는 그걸 왜곡된 지식정보에 오래 노출되는 데에서 오는 '낙진(落塵)효과'라고 규정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중•고교 시절과 대학생활까지 왜곡된 지식정보에 과잉 노출될 경우 세상과 사회를 보는 정상적인 안목이 형성될 리 없다. 많이 노출될수록 치유하기 힘든 병리학적인 인지(認知)구조를 낳을 수 있는데, 2014년 한국사회는 지금 중증(重症)의 인지부조화에 빠져있다. 그건 대한민국 원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몇 해전 작고한 기독교 핵심인물인 목사 고 강원용(1917~2006)같은 이도 그러하다.

원로목사 강원용의 비판에서 우석훈의 선동에 이르기까지

“나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던 1917년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 그간의 한국은 내 판단으로는 악마들이 집단을 이루어 지배하는 빈 들(누가복음 4장2절)과도 같았다.… 이 빈 들은 성서에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 경제제일주의, 악마에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사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회고록이자 현대사 증언 <빈들에서>(전3권, 대화출판사, 1998판 증보판)는 이렇게 서술돼 있다. 특유의 선악사관, 그리고 치명적인 근본주의적 역사 인식이 현대사에 대한 자해(自害)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름깨나 있다는 인물들이 이 정도인데, 이런 풍토에서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외치는 <88만원 세대>(우석훈 지음)가 얼마 전 베스트셀러로 떴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다"는 시골의사의 엉터리 진단

“짱돌을 들어라”라는 선동과 폭력 사주를 감히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게 이 나라다. 더 걱정스러운 사람이 시골의사’로 통하는 박경철이 그 경우인데, 그는 우석훈보다 상태가 더욱 안 좋다. 그는 음습한 형태로 사회에 대한 저주를 진행한다. 정치인 안철수의 최측근이라는 아우라를 가진 채 이 땅 10대들을 위한 멘토임을 자처하니 더욱 가관이다. 그가 3년 전에 펴낸 <자기혁명>(리더스북)이란 책에 담긴 지식정보의 왜곡현상에 필자는 더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금수(禽獸)의 규칙조차 통하지 않는 사회”이고, 정의롭지 못한 불공정 사회다. 이런 따위의 말은 포털에 올라온 토막 기사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짧은 인식에 불과한데도, 그는 겁이 없다. 한국사회에는“좌파라는 말이 나쁜 뜻이 아님에도 좌파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 하는” 풍토가 있다는 진단도 하던 그가 급기야 사고를 친다. 즉 이익 추구란 기업의 존재이유가 아니며, 성장일변도란 국가의 임무가 아니라는 발언이 그 대표적이다.

시골의사와 대통령의 인식은 실은 오십보백보?

“국가는 잠재성장률을 넘는 GDP 성장률을 목표로 내세운 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몇몇 대기업에 국가의 자원을 배분하고, 토목사업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성장을 좆는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곳에 가야 할 자원, 사회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투자해야 할 자원이 집중됨으로써 국민은 불행해졌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사회 전체가 헬레나의 입술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박사의 아바타가 되어버린 셈이다.”(19쪽)
 

놀라운 건 지금이다. 박경철 같은 야바위꾼의 3류 언어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과 뭐가 다를까? 지난 회 칼럼에서 필자가 밝힌대로 박근혜 대통령은 2년 전 대선 출정식을 통해 “국가는 발전했고, 경제는 성장했는데 행복은 커지지 않았다”고 했다. 안철수 류(類)의 정치인들이 약육강식의 폐해를 강조하고, 정글 자본주의가 어쩌고를 반복하는 발언과 너무도 닮았다. 실제로 그는 “원칙을 잃은 자본주의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말도 자주 했는데,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덜하다.

좌파와의 전쟁을 벌일 최고사령관은 좀더 강해야

좌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어야 할 최고사령관이 그가 좌파적 언어와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2014년 상반기 대한민국의 비극이 아닐까? 앞으로 더 점검해봐야 할 대목이지만 나의 중간 결론이 이미 충격적이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정체성마저 뒤흔드는 일은 국민들에게 너무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에게 경제민주화 구호는 전술, 그 이상이고 취임 전후 구호였던 국민행복시대의 선언, 기초노령연금 등 복지에 대한 강조 역시 좌파적 어젠더를 즉흥적으로 차용(借用)하는 박근혜 정치철학의 특징이 아니었던가?
 

이번 글이 좀 다루는 영역이 크고 추상도 역시 너무 높았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크고 넓게 보려는 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치공학에 매몰되지 않고 문화와 정치를 함께 볼 경우 지금 우리 사회는 비탈에 서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권에게 있고,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책무다. 세월호 사고와 문창극 파동이 사안의 심각성을 재삼 드러내준 셈일까?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