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 제우스 홀리는 시앗여인들, 동물변신 징벌내려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14) - 서양문명의 원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 오비디우스(BC 43-AD 17) <변신이야기>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화의 원류다. 신과 인간, 자연의 합중주다. 인간의 감성과 이성, 영혼을 자극하는 영원한 샘물이다. 그리스 신화는 여러 개별 작품에 산재해 있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신들의 계보>가 대표적 출처다.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는 여러 그리스 신화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신화 사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아니 번안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로마인인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를 통해 로마명으로 차용된 그리스 신화와 로마 건국 초기의 신화를 집대성했다. <변신이야기>의 3분의 2 이상은 그리스 신화다. 변변한 신화가 없었던 로마인이 동일한 역할의 그리스 신들에게 로마식 이름을 붙여 놓으니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로마식의 신들이 로마인에게 역사성과 정체성을 심어주는 풍성한 선물이었다는 점을 이해하자.

로마인들은 제우스를 유피테르로, 헤라를 유노로, 아테나를 미네르바로, 에로스를 쿠비도로, 아르테미스를 디아나로 신명(神名)을 개명했다. 하지만 신화가 펼쳐지는 지리적 공간은 대부분 엄연히 그리스 땅이다. 그리스 땅에서 그리스 신들이 그리스인과 벌이는 희로애락의 이야기에 로마식 신명을 붙인다하여 로마의 신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를 통해 로마의 뿌리 깊음과 건국의 위대함, 그리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영웅화하기 위한 로마 신화의 교과서를 훌륭히 만들어냈다.

신화의 모음집을 ‘변신이야기’로 제목을 붙인 이유는 신화의 상당 부분의 내용에 신과 인간이 다양한 동식물로 변신하는 대목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제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증오와 전쟁, 미움과 질투, 대립과 갈등의 소재까지 다양하다. 이 과정에서 신은 다양한 변신으로 초능력을 보이며 자신의 의도를 성취한다.

변신의 유형도 다양하다. 첫 번째 유형은 사랑의 유혹을 위한 변신이다. 천하의 난봉꾼 유피테르(제우스)는 수많은 신과 아름다운 인간 여성을 구애하고 유혹하기 위한 은폐와 변신에 달통해 있다.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 백조로 변하는 가하면, 에우로페를 납치하기 위해 황소로 변신한다. 다나에와 교합하기 위해 황금비로 스며들기도 한다. 사랑에 들뜬 유피테르의 변신술은 신선하고 기발하여 밉지 않을 정도다.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레다(Leda) 왕비를 유혹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 레다의 허벅지를 움켜쥔 백조의 발 갈퀴가 제우스의 거친 욕망을 상징하는 듯하고, 백조의 뒤에서 사랑을 부추기는 에로스의 형상이 인상적이다. 이들의 딸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렌이 태어난다. 크레타 섬 크로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1~2세기 작품으로 추정됨.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다나에>, Rembrandt(1606–1669), 1636~1643 작, Hermitage Museum 소장, 사진 Quadell

두 번째 변신의 형태는 징벌로서의 변신이다. 제우스의 첫째 부인 헤라의 질투와 보복은 또 다른 변신의 사례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자신의 ‘시앗’이 되는 여인들에게 반드시 징벌을 내린다. 제우스를 홀렸다하여 칼리스토르를 곰으로 변하게 한 것이 그 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다른 신들도 뒤지지 않는다. 아르테미스(디아나)가 숲 속에서 목욕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길을 잃어 우연히 보게 된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가혹한 징벌의 변신술이다. 베 짜기 경쟁에서 아테나를 이긴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하게 한 ‘금발의 처녀신’ 아테나의 옹졸함도 이런 유형이다.

   
▲<디아나(아르테미스)의 목욕>, 왼쪽에 말을 타고 사냥에 나선 악타이온의 모습과 오른쪽에 사슴으로 변한 악타오온이 사냥개들에게 찢겨 죽는 모습이 담겼다. 프랑수아 클루에(Francois Clouet, 1515–1572) 1559 - 1560? 사이 작, 상 파울루 미술관(Sao Paulo Museum of Art) 소장 
 

그래도 헤라의 질투심이 가장 유별났다. 그녀의 저주는 당사자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다. ‘시앗’이 낳은 자손들까지 끈질기게 그 죄과를 추궁했다.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괴롭힘과 저주에 시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제우스가 테베의 왕 암피트리온(Amphitrion)의 아내인 알크메네와의 사랑으로 헤라클레스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의 바람기가 낳은 수많은 자식들이 등장한다. 제우스는 왜 그토록 여인들의 사랑에 목말라했을까? 아니면 왕성한 종족 번식 욕구를 주체할 수 없어서였을까? 그는 못 말리는 색탐의 소유자였을까? 그는 신들의 신, 즉 최고신이다. 그가 자신과 인간 여성과의 사랑의 결실로 반신(半神)의 자손을 번성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스 신화 어디에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나는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신화는 상징이자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헤라는 원래 그리스 서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 지역의 토착신이다. 반면 제우스는 도래인들의 신이다. 그렇다면 제우스의 숱한 염문은 도래인들이 그리스 토착민들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토착민들과 융화하기 위한 결혼 정책의 한 양태를 상징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정은 그리스 왕족이나 영웅들이 제우스나 기타 여러 신들의 자손이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높다. 엄연히 생부와 생모가 있는데 다른 씨앗에 의해 탄생했다면 이는 부정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제우스와 신들의 바람기 결과는 왕족과 귀족들을 신의 가계에 입문하게 했다. 이는 백성의 경외감과 신망을 받기에 더없이 좋은 보증수표가 아닌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치고 신의 가문이 아닌 사람이 드문 것도 이 때문일 듯싶다.

<변신이야기>에는 원한을 풀기 위해 또는 인간이 죽음에 처하거나 궁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물이나, 새, 나무, 꽃으로 변신하는 신화도 많다. 물론 변신은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염원을 인지한 신의 배려의 산물이다. 배신한 미노스를 저주하기 위해 물새가 된 스킬라가 바로 그 예다. 아폴론이 던진 원반에 본의 아니게 죽음을 맞이한 히아킨토스를 애도하기 위해 히아신스 꽃으로 피어나게 한 것도 애틋한 부활의 변신이다.

<변신이야기>는 변신 신화와 설화 이외에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도 많이 담고 있다. 이아손, 테세우스,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 등이 그들이다. 오비디우스의 전쟁 묘사는 잔인하리만큼 정밀하다. 켄타우로스들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이 특히 그렇다. 피가 튀기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며, 창자가 뚫려 나오는 생생한 장면 묘사가 마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몇몇 전투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킬레우스가 죽은 후 그의 유명한 무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이약스(아이아스)와 울릭세스(오디세우스)가 벌인 설전은 설득의 연설로 백미다. 가문의 위대함과 무공을 자랑하는 아이아스에 대해 "싸우는 자가 지혜로운 자만 못하다"고 몰아붙여 무구를 차지하는 오디세우스의 교언과 설득력은 볼만하다. 아이아스가 분에 못 이겨 자결하고 마는 것도 오디세우스의 언변에 의해 그가 당한 치욕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변신'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을 관통하는 콘셉트로 하여 신화를 '시간 순서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물론 완벽하게 시간 순서가 맞는 것은 아니다. '변신'의 능동적 주체는 당연히 초월적 능력을 가진 신이다. 인간은 신의 조화에 의해 변신이 가능할 뿐이다. '변신'은 신의 삶의 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때로 상대를 속이고 유혹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시켰다. 가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징벌의 수단으로도 인간을 동식물로 변신시켰다.

다양한 자연으로의 변신은 인간의 즐거운 상상을 마음껏 충족시킨다. 인간이 이룰 수 없는 변신의 욕망을 신이 자유자재로 보여줌으로써 신의 권능을 인식하게 하려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인간의 욕구를 신을 통해 구현해 보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신과 인간의 변신이 일탈이 되었든, 갈구의 실현이 되었든 인간과 신, 그리고 변신의 대상물인 자연과의 자연스런 교감과 소통의 결과다.

신과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자연은 어느덧 신성과 인성이 깃든 존귀한 존재가 된다. 이런 사유는 인간의 영혼불멸과 자연물로의 환생에 대한 믿음과도 연결된다.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의 꿈, 영원히 살고자하는 불멸의 욕구를 변신의 가능성을 통해 그리스 신화가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이 책의 끝 부분에 느닷없이 피타고라스를 등장시켜 동물 살생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대목을 삽입한 것도 이런 사유의 철학적 배경을 보충하려한 것 같다.

신화는 인간의 희망이자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변신은 멀고 먼 옛날 이야기되고 말았다. 이제 인간이 신에게 도전에 보는 일은 신화 속에 갇혀 버렸다. 현대인은 도덕적 윤리적 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인 삶은 원죄에 묶여 궁박한 삶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을 닮은 신과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던 고대 그리스인의 자유로운 영혼과 삶의 방식이 때로 그립다.

이 책은 그리스 신화를 로마화하면서 다소 무리한 기술도 보인다. 예를 들어 멸망한 트로이의 패장 아이네이스를 300~400년 이후의 로마의 개국시조 로물루스의 가계와 연결 짓는 것이 그렇다. 또 로마 2대 왕인 누마 왕이 자신보다 200여년 뒤에 태어난 피타고라스에게서 철학을 배웠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물론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애교로 봐줘도 될 듯싶다.

   
▲하드리안 황제의 화려하고 위엄이 넘치는 흉갑에 새겨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상,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 크레타 크노소스 궁에서 발굴된 2세기경 작품,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 박경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신화는 현재의 서양 문명에 그대로 살아 움직인다. 신화속 주인공들은 3천여 년 동안 서사시와 비극, 희곡, 소설, 회화, 조각, 건축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현대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는 박물관이 아닌 유럽 사회와 거리 곳곳에서도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을 빼고 서양 문명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일, 그건 바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추천도서 : 『변신이야기』,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5쇄), 7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