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간파한 설득의 연설술, 국민현혹 선동과 달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21) - 로마의 현인 키케로의 지성의 연설술 키케로(BC 106-BC 43) <수사학>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의 이론적 체계를 정립했다면, 키케로는 수사학의 실용적 기법을 보충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로마시대 최고의 연설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키케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배웠는지 여부가 문헌상으로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 가부에 대해서 연구자의 의견도 갈린다.

어떻든 그는 <수사학> 말미에서 자신의 수사학 체계가 플라톤 아카데미아에서 훈육되는 방법론과 연습의 결과로 나온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케로의 수사학이 아카데미아 학파가 축적하고 발전시킨 수사학의 진수들에 빚지고 있음은 틀림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설득의 대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 등 제반 증거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논증의 전제로 기술하고 있는데 반해, 키케로의 <수사학: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는 상대적으로 연설과 변론에서의 기술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연설가의 5가지 핵심 역량

이런 점에서 키케로의 <수사학>은 그의 특장인 연설과 변론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연설가(orator)가 갖추어야 할 고유한 역량을 기술하고, 연설의 기법, 특히 칭찬 연설, 정책 연설, 법정 연설의 핵심 요소들과 쟁점, 각 연설들의 효과적인 전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연설가에게 필요한 핵심 역량은 다섯 가지다. 발견(inventio), 배치(dispositio), 표현(elocutio), 연기(actio), 기억(memoria)이 그것이다. 키케로는 이것들을 연설가의 ‘고유한 힘’이라고 불렀다. 연설가의 설득력이 바로 이런 능력에서 나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최고의 연설가가 되기 위해 함양해야 할 덕목과 기량을 제시한 셈이다.

첫 번째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발견(inventio)’해내야 한다. 이는 곧 감동과 논증에 연관된 문제다. 특히 사람들을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청자(聽者)의 다양한 파토스(pathos, 감성과 정념)에 부응하는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둘째, ‘배치(dispositio)’의 문제에서는 연설에서 감동과 논증을 겨냥하되, 연설의 목적에 따라 배열 방식이나 우선순위를 달리 구성해야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칭찬 연설에서는 즐거움, 정책 연설에서는 결정권자의 희망과 두려움을 우선으로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 화제의 경중(輕重), 대소(大小), 단순함과 복잡함 등의 여하에 따라 적절한 배치의 순서를 달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 연설에서 단어 선택과 단어의 연결 구성, 문법적 일치 등에 유의하고, 전반적으로 ‘표현(elocutio)’이 명확하고 간결해야 하며,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콤하고 우아한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거나, ‘표현이 조작을 통해서’ 자신의 성품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지는 상황의 요구에 따라 연설가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넷째, 연설가가 사안과 단어에 맞게 적정한 목소리, 몸짓, 표정을 짓는 ‘연기(actio)’를 통해서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다섯 번째, 연설가는 화제와 관련된 기록이나 기억을 잘 저장해 놓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memoria)’은 “마치 밀랍처럼 장소를 사용하고 이 장소에 표상들을 철자처럼 모아둠을 통해서 형성된다.”

연설은 서론, 사실 기술과 논증, 결론 등 네 단계로 전개된다. 연설의 시작 단계에서 청중의 호감을 얻고 주의를 끌어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실 기술 부분에서는 명확하고 납득이 가도록 해명하는 ‘선명성의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키케로는 논증 단계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과, 반박해야 할 경우 상대방의 주장을 무력화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입증을 위해선 사건의 장소, 시간, 사안의 정의(定義)를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반박을 위해선 개별 논거의 오류나 잘못된 전제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연설의 마무리 단계에서는 입증하거나 반박한 논지를 명쾌하게 재강조하고, 사안의 결론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거나 해악을 끼치는 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청중의 도덕적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 키케로 흉상,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Capitoline Museums) 소장, 사진 Glauco92

연설의 유형에 적합한 설득 전략

키케로는 보편적 연설의 기법 이외에도 연설의 유형별로 적합한 연설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정책연설에서는 정책의 유용성과 실현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한다. 이는 현대 정책학에서 정책 제안시 ‘소망성(social desirability)’과 실현가능성(feasibility)을 중시하고 있는 맥락과 그대로 일치된다. 키케로는 정부 정책이 입안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법적 공방이 이루어지는 법정 연설에 대한 키케로의 방법론도 오늘날 법률가의 변론술의 핵심을 잘 제시하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가치 판단을 놓고 공방을 벌일 때 형평성과 적법성의 두 잣대를 주문한 것도 의미가 크다. 고소-고발 사건에서의 ‘방어 논거’와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 주장하는 ‘핵심 논거’ 간의 공방 방식에 대한 대립적인 방법 제기 대목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윤리적 접근은 잠시 접어둔다. 고발자과 피고인의 각각의 입장을 변호해야 할 각각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연히 가치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발인과 피고인의 입장에서 각기 취해야 할 방법과 쟁점의 시각은 사뭇 상충적이다. 하지만 이는 변론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고발인의 변호에서는 고발인의 입장에, 피고인의 변호에서는 피고인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범죄에 대한 변론에서 고발인의 입장에서는 고문에 의한 자백을 유효한 논거로 강조하라고 하면서,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고문 그 자체의 무효성을 강조하라고 제시한다. 이 사안에 대한 키케로의 속내의 가치판단은 무엇일까?

   
▲<카틸리나의 내란 음모를 고발하는 키케로>, 집정관에 여러 차례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자 국가 전복의 음모를 꾸몄던 카틸리나의 내란 음모에 대해 키케로가 원로원에서 이를 고발 탄핵하는 명연설을 했다(BC 63). 중앙에 서서 양손을 벌리고 연설하는 이가 키케로, 오른쪽에 동료 의원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는 이가 카틸리나이다. Cesare Maccari(1840–1919)의 1889년 작,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마다마 궁(Palazzo Madama) 소장

키케로는 근친상간범과 내란 음모자의 경우에 한해 고문이 가능하다는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어 흥미롭다. 패륜과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올 극단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만은, 피고인의 인권보다 공동체의 가치 수호를 위한 비인권적 방식을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고민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깊은 뜻이 담긴 취지만큼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키케로가 법정 연설에서 형평성을 거듭 강조한 대목도 유의할 만하다. 그는 형평성의 힘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이른바 공정성과 선량함의 원칙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호 균등 원칙(동가 원리)과 관련된 것으로, 이에 따라 호의에는 보은이, 불의에는 처벌이 주어진다.” 자유와 정의, 진실의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실제 키케로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법정에 섬으로써 정치적 박해나 신변의 위험을 겪기도 했다.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변호를 하는 바람에 당시 독재관인 술라의 분노를 사서 상당 기간 피신해야만 했던 사례를 이를 잘 말해준다.

키케로의 수사학은 매우 구체적인 연설의 기법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연설의 규칙은 말의 기교만으로 수행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가 서구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의 창시자답게 인본주의(humanismus)를 실천하고자 애쓴 사람답게 그의 수사학은 인간의 본성을 잘 통찰하고 있다.

그의 수사학에는 인간 본연의 본성과 감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논리로 설득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변론가이자 철학자였다. 이런 관점이 그가 제시하는 수사학에 관통하여 스며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을 현혹시키는 수사(rhetoric)로 국민을 현혹시키는 선동적 정치인이 득세하는 요즘, 이성과 감성을 울리는 지성의 연설로 국민과 소통하는 키케로와 같은 정치인이 그립다. /박경귀 행복한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추천도서 : :『수사학』, 키케로 지음, 안재원 편역, 길(2012, 8쇄), 4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