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규태 '픽셀'전, 공산품서 예술을 꺼내다
문화 마케팅 가능성은 없을까 검토할만한 케이스
   
▲ 조우석 언론인
작곡가 J.S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건 순전히 근대 일본이 학습상의 편의를 고려해 만든 암기법이라서 한·중·일 세 나라에서만 통하는데, 사진의 신세계인 현대사진의 문을 연 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두가 공감하듯 단연 로버트 프랭크다.

이전과 이후가 쫙 갈리기 때문이다. 1958년 구겐하임재단의 지원으로 만든 사진집 <아메리카인> 출간이 분기점인데, 그 전까지 중시됐던 프레임, 입자, 톤 등 사진언어를 뒤집으면서 현대사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사진집을 처음 봤던 사진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은 "폭탄이 터진 충격"을 토로했을 정도다. 그러나 J.S 바흐나 로버트 프랭크 얘기론 심심하다.

그럼 한국 현대사진의 문은 누가 열었지? 한 번쯤은 그런 질문도 던져봐야 한다. 그래야 당신이 바다 건너 서구 얘기만 반복하는 지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않는데, 한국 현대사진에 공헌한 작가론 원로 황규태(81)를 뺄 수 없다.

   
▲ 태양을 찍은 필름을 태워 만든 작품 '녹는 태양(Melting the Sun)' 앞에 서 있는 작가 황규태를 이중 노출 기법으로 찍었다. 오른쪽 사진은 황규태 작가의 작품 pixel, 2018, 222 x 150.

사진으로 구현한 플럭서스 정신

예술사진이라며 흑백만 고집하던 1960~70년대에 칼러사진을 첫 도입했던 작가, 사실주의 사진만을 정통으로 알던 국내 풍토에서 필름 태우기, 차용과 합성, 몽타주, 이중 노출 등을 시도한 자유로운 영혼이 바로 그다. 물론 지금도 가장 젊은 작업을 하는 작가인데, 그런 사진의 아방가르드를 올 봄 제대로 만나볼 기회가 생겼다.

황규태 개인전 '픽셀 Pixel'이 열리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3월 7일부터 4월 21일까지)이 그 공간인데, 자신한다. 현대사진의 최전선이 지금 이 시각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멋진 문화체험을 당신은 할 수 있다. 로버트 프랭크가 현대사진의 문을 연 뒤 황규태의 '픽셀'은 어디쯤을 탐색 중인가도 가늠될 것이다.

전시장 3개 층을 채운 30점을 두고 이런 것도 사진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놀이로서의 사진이라서 무겁지만은 않다. 백남준이나 조셉 보이스 식으로 말하면 '사진으로 구현한 플럭서스 정신'이다. 플럭서스는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했던 아방가르드 문화패거리로, 반(反)예술-반 문화로 치달으며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는 과격함도 선보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놀이로서의 예술에 충실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측면이 플럭서스에는 있다. 황규태의 경우도 강력한 반 예술적 실험과, 유쾌한 놀이로서의 사진 작업을 함께 수행해왔다. 일테면 작업 초기 필름 태우기의 경우 태양을 찍은 네가필름을 라이터로 살짝 태우는 작업도 선보였다.

그걸 인화하면 마치 태양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 착시 효과를 안겨주며, 관람객에겐 지구촌 생태 위기를 전달하는 메시지로 전달된다. 그렇게 전위에서 서왔던 그가 이번에 보여주는 것은 사진에 대한 당신의 통념을 다시 허문다. 당신은 "이것도 사진인가?", "대체 무얼 찍은 거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출품작은 사진이라고 하면 사진이고, 아니라면 아니다.

현대사진의 기본은 찍는(take) 사진보다 만드는(make) 사진인데, 출품작들은 둘 모두를 겸하기 때문이다. 즉 피사체를 재현하기 위한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되고, 피사체 재현을 포기한 채 '만드는 사진'의 전형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얘긴가?

90년대 후반 작가 황규태는 우연히 브라운관, TV모니터를 루페(확대경)로 들여다보면서 육안으로는 보지 못했던 픽셀의 세계를 발견하는데, 그게 초기였다. TV모니터의 픽셀은 제조사에 따라 원, 사각형, 타원형 등이고 색 조합은 무궁무진한 신세계였다. 그러나 조금 단조로웠다. 그게 픽셀 1기라면, 지금 아라리오갤러리 출품작은 픽셀 2기다.

픽셀 1기 때 찍었던 자신의 작품의 파일을 다시 수 십 배로 키워서 찍은 작업이다. 즉 픽셀 1기가 원래 사이즈를 몇 백 배 정도로 키웠다면, 픽셀 2기는 수 천 배로 키운 것이다. 픽셀 1기가 분자-원자 수준이라면, 이번 출품작은 전자-양자-소립자 수준으로 확대됐다.

   
▲ 황규태 작가의 작품 pixel; bit의 제전, pigment print, 280 x 650 (5pcs).

디스플레이 부문 엔지니어들이 전시 봐야

놀라운 건 배율이 아니다. 비유컨대 전자현미경으로 이미지의 최소단위인 DNA를 포착한 느낌인데, 사실 픽셀(pixel: picture element를 줄여서 합한 말)은 이미지의 최소 단위를 뜻한다. 그런 픽셀이 벌이는 이미지의 잔치가 정말 뜻밖이다. 그렇게 현란하면서도 동시에 미니멀할 수가 없다. 평론가 이영준의 말대로 예술적 금욕주의와 예술적 탐미주의가 공존하는 세계다.

달리 말해 절제된 상상력과, 못 말리는 관능이 춤을 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던 TV화면, 컴퓨터 모니터 화면 안에 저런 이미지의 신세계가 숨어있었다는 게 놀랍고, 컴퓨터 작업을 통해 그걸 포착해낸 현대사진의 마술 혹은 현대사진의 영토 확장이 다시 놀랍다.

전문가들은 픽셀 작업의 속성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진상의 이미지는 실재, 즉 피사체의 끈을 끊고 떨어져 나와 비물질, 순수 추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추상화의 절대주의'를 창출해낸 그 전설의 말레비치 숨결이 이번 출품작 곳곳에 숨어있다.

때문에 황규태 '픽셀'전은 사진이되 사진이 아니며, 피사체를 재료 삼아 새로운 시각 이미지를 창조한 신세계가 맞다. 어려운 얘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이걸 속화(俗化)시켜서 말하고 싶어 입술이 근질댄다. 황규태의 '픽셀'전을 봐야 할 사람들은 미술 애호가만이 아니다.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TV화면, 컴퓨터 모니터 화면 등 디스플레이 부문의 엔지니어가 아닐까?

저런 이미지의 세계가 튀어나온 현대사진이란 이름의 마술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자신임을 알아채길 나는 원한다. 플럭서스 패거리의 말대로 예술과 삶은 본래 하나인데, 그뿐인가? 현대세계 공산품과 예술 역시 하나라는 발견과 함께 무한한 자부심을 갖길 원한다.

그것만으로 훌륭한 만남, 멋진 영감의 자리가 될텐데, 숙제가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TV화면,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이렇게 멋진 문화의 아우라를 만들어낸 황규태란 작가를 어떻게 활용할 순 없을까? 구체적으론 요즘 화두인 문화 마케팅인데, 전시회가 끝난 뒤 그 가능성을 짚어보는 담론을 한 번 더 펼칠 생각이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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