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문재인 대통령이 동남아 3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인 17일 청와대는 북미대화의 조기 개최의 필요성을 밝히면서 문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청와대는 북미대화 촉진을 위해 남북대화를 할 시점이 됐다고 판단하고 대북특사 파견 시점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는 미국이 제기한 빅딜 대신 “스몰딜을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괜찮은 거래)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해 미국과 엇박자를 낸 상황이다. 이는 북한의 최선히 외무상이 최근 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미국 내에서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도 “남한은 중재자가 아니라 플레이어”라고 말하는 등 문 대통령의 신뢰도가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문재인정부의 역할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노이회담이 노딜로 끝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변핵시설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전부 폐기하는 빅딜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일시에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올 오어 낫씽’은 우리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비핵화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서는 한두번의 연속적인 ‘얼리 하베스트’(early harvest·조기 수확)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조기 수확을 통해서 상호신뢰를 구축하게 되고, 구축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최종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고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가 내놓고 있는 발언은 일단 미국의 입장과 차이가 크다. 게다가 미국의 빅딜 제안은 비핵화의 조기 달성 목표 외에도 북미 간 비핵화 개념이 서로 다른 것에서 기인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청와대가 아직까지 안일한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노이회담 이후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3차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놨지만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17일 워싱턴포스트(WP)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수미테리 선임연구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비핵화에 관한 이 같은 새로운 인식이 북한과 정상급회담을 거부해온 과거 행정부에 맞서 구체적인 비핵화 로드맵이 없는 상태로 직접 김 위원장과 만난다는 전략에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4월27일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까지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한국사진공동기자단


이런 가운데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정의는 매우 포괄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 국내에서도 문재인정부가 비핵화로 포장된 북한의 공세에 말려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됐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비핵화 개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면서도 “어떤 상황이 되어야 북한의 핵활동 중단으로 볼 것인가, 어떤 시설이 해체돼야 북한이 핵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할지를 정의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비핵화의 최종 단계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큰 과제”라면서 “그 로드맵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남북미 3국 정상간에만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결단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 정의에 대해서는 이미 1992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적시된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정이 있다. 남과 북의 핵무장을 금지하는 비핵 8원칙과 재처리, 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을 골자로 한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17일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정의는 매우 포괄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발언은 정부의 북핵 정책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대한 언급이라는 점에서 심층적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비핵화의 정의가 포괄적이라는 인식은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폐기라는 미국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와도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핵화의 최종 상태는 남북한의 핵무장 포기와 정전체제 및 한미동맹 존속”이라며 “한미 양국은 핵개발을 미끼로 한미동맹과 정전체제를 와해하려는 북한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 비핵화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정부와 국민 모두 이제 더 이상 북한의 비핵화 용어혼란전술에 속지 말고 비핵화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야한다”고 말했다.

이날도 청와대는 남북미 정상간 톱다운 방식의 협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정상간 대화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실무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당장 차기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에 큰 부담이 뒤따른다. 어지간한 스몰딜로는 노딜보다 더 큰 성과를 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노이회담 이후 문 대통령이 동남아 3국을 순방하는 동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중국,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미국을 다녀온 데 이어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8일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는 최근 북한의 고위급인사와 접촉이 많았다. 이도훈 본부장의 보고까지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내밀 ‘대화 촉진 카드’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