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취임 이후 서울을 모두 바꾼 돌격 시장
급격한 도시화 성공시킨 20세기 문제적 인물
[연속칼럼]'내가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인물 셋'- 中

   
▲ 조우석 언론인
한국일보를 1954년 창간했던 백상(百想) 장기영에 나는 전부터 끌렸다. 그를 모셨던 기자 중 백상을 욕하는 걸 보지 못했지만, 그 많던 별명도 언론 사주(社主)론 이채롭다. '보스', '왕초' 혹은 '야전사령관'…. 한국일보 사사(社史)는 그를 "제왕, 그러나 이따금 눈물을 떨구는 폭군"이라 했는데, 이건 또 뭐지? 68년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에 불이 났을 때다.

혼비백산한 백상은 그 와중에도 사진기자들에게 고함을 꽥꽥 질러댔다. "저 불꽃을 찍어! 옥상의 불타는 사기(社旗)를 사진 찍으란 말이야!"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 김요섭은 그 도깨비를 이렇게 해독했다. "장기영은 포에지(詩)의 아들이다. 불꽃, 그것이 그의 미학이 아닐까?"

그러나 세상이 기억하는 장기영의 별명은 불도저다. 1960년대 초 경제부총리 시절 얻은 것인데, 그 원조 불도저를 밀어낸 괴물이 따로 있다. 서울시장 김현옥(1926~1997)이다. 오죽하면 3년 전 서울시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했던 특별전 제목을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라고 정했을까? 백상도 멋지지만 그보다 더 극단적 캐릭터가 김현옥이다.

   
▲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불도저시장 김현옥' 전시회 포스터. 포스터의 배경은 1966년 광화문지하도 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김현옥 전 시장의 모습이다. /자료=조우석 제공

'돌격'이라 쓰여진 헬멧을 쓴 시장님

오늘의 서울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그걸 재임기간 단 4년에 뚝딱 해치웠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 김현옥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다. 시장 재직 중 "건설은 나의 종교"라고 말했던 김현옥답지 않은 비극적 몰락이었다. 

그런 김현옥은 평소 "행정은 열정이다"고 말하며 신들린 무당처럼 열에 들떠 집무했다. '돌격'이라고 쓰여진 헬멧 차림에 군 지휘봉을 쥐고 현장을 지휘했던 그가 서울시를 떠난 지도 반세기 가깝다. 그를 객관적으로 볼 시점인데, 서울의 3대 관선(官選) 시장으로 보통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을 꼽는다지만 그중 으뜸은 김현옥이라는 게 정설이다. 

<서울 600년사> 제6권의 자리매김대로 "김현옥 이전에 김현옥 없었고, 김현옥 이후에 김현옥 없었다". 그게 맞다. 서울시장을 조선시대에는 한성 판윤(判尹)이라고 불렀는데 그동안 1500명에 가까운 역대 판윤-시장 중 그가 가장 출중했다는 평가다. 단 그게 꼭 호평만은 아니다.

"그는 66~70년 재임 4년 간 실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저질렀다는 표현은 엄청난 것을 이룩했고 파괴했으며 동시에 해서는 안 될 일도 했다는 뜻이다." 그게 도시계획전문가 고 손정목 교수가 내린 냉정한 평가다.(<서울도시계획이야기>제1권 208쪽) 사람 평가이건, 영화이건 과장 없이 사람을 그려내는 게 정상이고, 그래야 소구력이 높아진다.

김현옥은 오늘도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광화문지하도, 명동지하도를 포함해 숱한 지하도를 만들었고, 청계고가도로와 남산 1,2호 터널을 세우고 뚫었는가하면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을 포함해 봉천-신림-상계동 지구도 만들었다. 북악스카이웨이, 강변로도 그의 작품이다. 하나하나가 화제였고, 시끌벅적했다.

일테면 광화문지하도는 요즘 보면 그저 그렇지만, 66년 개통 때는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도"라며 대통령 내외가 나와 테이프커팅을 했다. 놀랍게도 총길이 154m의 지하도를 단 5개월여 만에 끝낸 대기록도 그때 세웠다. 당시 한국의 토목기술은 거의 원시상태였는데도 그런 게 가능했던 배경엔 김현옥의 밀어붙이기 식 불도저 행정이 있다.

지금의 한강 개발도 그가 첫 삽을 떴다. 한강 개발의 하이라이트가 여의도인데, 당시엔 상습 침수지구라서 사람이 못 살았다. 그걸 오늘의 거대타운으로 만들어낸 주인공이 김현옥인데, 여의도를 감싸는 높이 15m 제방(윤중제)을 쌓으며 죽었던 땅 90만 평이 서울시민의 것이 된 것이다.

참고로 윤중제 대공사는 110일 만에 뚝딱 해치웠다. 여의도에 천막 청사를 만들고 현장지휘를 했던 김현옥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한강을 다스려야 한다는 박정희의 의중을 읽어내고 선제적으로 깃발을 들었으니 임명권자가 그를 아니 좋아할 수 없었다. 더 기억해둘 건 여의도의 탄생이 강남 개발로 이어지는 결정적 교두보였다는 점이다. 

'나비 작전'이란 이름 아래 도심의 거대한 창녀촌이던 속칭 종삼을 철거시키고 그 자리에 종묘에서 필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주상복합 세운상가를 우뚝 세웠던 주인공도 그다. 김현옥은 한마디로 토목공사의 화신이었다. 그를 임명했던 박정희는 "건설을 두려워 말라"고 지침을 줬고, 그 역시 "건설은 나의 종교"란 모토로  화답했다. 

   
▲ 시장 집무 당시의 김현옥. 여의도 개발 관련한 보고를 청취하고 있다. /사진=조우석 제공

'빨리빨리병'도 결국 김현옥의 유산 

어쨌거나 이 나라 부동산 신화는 김현옥의 토목공사로 시작한 셈이니 김현옥은 그걸 상징한다. 결국 그의 유산은 곱건 싫건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물론 '일 열심히 한 사람'은 영화 캐릭터로 그리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단 김현옥 엉뚱한 구석도 많았는데, 자기과시욕이 대단했다. 

한 달마다 색다른 시정 구호를 내걸어 시장의 존재를 알렸다. "도시는 선이다", "질서는 시민의 위대한 예술이다". "개인의 완성은 서울의 완성"…. 단 자기과시욕이란 임명권자에 대한 충성, 그게 전부다. 일테면 그는 시내에 처음으로 아파트를 세운 장본인인데, 하필 맨 처음 착공한 게 68년 서대문 현저동의 금화아파트 19개 동이었다.

"왜 높이 105m의 산꼭대기 저 곳에?"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부하들에게 김현옥이 이렇게 일갈했다. "야, 이 새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박정희바라기' 김현옥은 알아주는 주군(主君)을 위해 영혼을 하얗게 불살랐던 사람이었다. 

옳건 그르건 그게 영혼 없는 오늘의 공무원 사회에 많은 걸 암시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장기영처럼 포에지(詩)의 아들이기도 했다. 여의도 제방공사 때 문득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여기 한강 여의도는 400만/우리의 기운이다//…여기 한강 여의도에 우리의 지혜 정열 의욕 희망 그리하여 우리의 혼마저 들어 뭉쳐있다."(시 '여의도' 일부) 

딴에 흡족했던지 김현옥은 그 시 아닌 시를 영역(英譯)까지 시켰으니 많이 웃긴다. '박정희의 불도저 김현옥'을 영화로 만들 때는 빛나는 조연도 있으니 그 점도 참고하길 바란다. 대하소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가 김현옥의 친구였는데, 재임 중 가장 자주 만난 인물로 그가 꼽힌다. 

확실히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던 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 육사 3기로 5.16 당시에 제3항만사령관이었다. 5.16 직후 영남지역 장악이 소중하던 박정희를 가장 즐겁게 해준 것이 그였다. 중령 김현옥이 휘하 장병을 이끌고 부산 시내를 장악함으로써 5.16의 전국적 성공을 이끌어낸 것이다. 훗날 부산을 찾았던 박정희가 제일 먼저 김현옥과 악수했던 것도 당연하다.

당시 나이 34세이던 그를 부산 시장에 임명한 뒤 그의 빼어난 일솜씨에 반해 드디어 서울에 불러들였던 것이다. 박정희로서는 자신의 아바타를 얻고, 김현옥은 주군을 얻으면서 그게 한 시대를 휩쓸었다. 훗날 시골(경남 양산)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던 김현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세상은 그걸 낡은 유산으로 평가절하하지만, 그것도 유행일뿐이다. 언제 우리가 김현옥처럼 미친 듯 일에 몰두해보았던가? 한국인에게 당시 기억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패티김의 히트곡 '서울의 찬가'가 그의 재임 시절인 69년에 등장한 것을 보라. 그게 우연일까? 그렇다면 그가 취임했던 1966년을 본따 영화 제목을 '응답하라 1966'으로 하면 어떨까?

참고로 1966년은 현대사의 분수령이 맞다. 66년 끝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춘궁기가 사라졌다. 즉 고도성장에 따르는 도시화를 성장동력으로 전환시킨 영웅이 김현옥인데, 그를 다룬 영화가 대박을 못 이룰 게 없다. 그리고 그 영화 한 편이 부진의 늪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줄지 누가 알랴?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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