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우의 컬쳐쇼크
[미디어펜=이원우 기자]빅뱅의 전 멤버 승리의 ‘버닝썬’ 사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K팝의 기수요 나라의 자랑거리였던 이들이 숨기고 있던 뒷면의 그늘은 국민들 다수를 어둡고 냉소적으로 만들고 있다.

나비효과는 정준영으로, 로이킴으로, 에디킴으로 옮겨갔다. 특히 이번 주말엔 에디킴의 2014년 노래 ‘너 사용법’의 원제가 ‘여자 사용법’이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여자 사용법’은 제작자 윤종신에 의해 만류되면서 결국 ‘너 사용법’으로 발표됐다는 후문이 5년 만에 알려진 것이다.

   
▲ 사진=에디킴 앨범 '너 사용법'(2014)


‘너 사용법’과 ‘여자 사용법’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너’라는 2인칭은 세상의 단 한 사람, 노래(말)하는 이의 상대편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 1명을 향한다. 둘만의 내밀한 시간에 ‘사용법’이라는, 제품 설명서에 들어갈 것 같은 딱딱한 단어가 들어가면서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그게 이 노래의 맛이었다. 가사를 보자. 

“부드럽게 무드 있게 따뜻하게 꼭 안아 주시오 / 매일 한 번씩 사용하시오 / 부드러운 눈 마주칠 땐 미소 지어서 / 그녀를 웃게 Hey What's up beauty 말을 거시오” (…) 다른 여자 앞에선 이성적이지만 / 이상하게 너 앞에선 감정이 앞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제정신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긴장되는 그 마음을 부여잡기 위해 매뉴얼까지 필요하다면 풋풋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자 사용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자는 1명이 아니다. 인류의 절반이다. ‘여자 사용법’이란 말에는 이 매뉴얼의 대상이 되는 사람만의 특별함이 생략돼 있다. 누구든 여자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동원되는 ‘사용법’에는 풋풋함도 설렘도, 매력적인 이질감도 없다. 여성(女性)이 그저 공략해야 할 성, 여성(女城)으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면 ‘성적 대상화’다.

이번 논란은 지금까지 진행된 승리 사태와는 약간 다른 결을 갖고 있다. 이른바 ‘카톡방 멤버’들이 발표한 ‘작품’에 포커스가 맞춰진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들은 이들이 그동안 카메라 뒤에서 벌였던 행태만이 아니라 그들이 발표했던 작품을 향유하며 느꼈던 개인적인 시간들까지 미워하고 후회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내놓은 작품은 세상 속에서 고유한 생명력을 띠며 독자적으로 생존해 간다. 에디킴의 ‘너 사용법’을 들으며 느꼈던 감동은 듣는 사람의 것이다. 그의 불법한 행동이나 원제목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노래를 들으며 좋아했던 과거의 시간까지 부정해 버리는 건 아님을 확인해둘 필요는 있다.

문제는 앞일이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너 사용법’을 과거와 같은 마음으로 들을 수는 없게 돼버린 것이다. ‘여자 사용법’보다 가벼운 감정을 노래하는 작품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과 같은 경로를 거쳐 ‘너 사용법’의 민낯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라고 말한 것은 니체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일군의 연예인들이 품었던 내면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할까. 그들의 어둠이 이제는 노래를 듣는 귓가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총체적 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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