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신작을 '창비'에 게재했다가 역풍 만나
"꼰데 백낙청이 문제" 네티즌 비판 확산 추세
   
▲ 조우석 언론인
표절 파문 이후 칩거에 들어갔던 소설가 신경숙이 4년 만의 신작 발표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사람들 마음은 싸늘하며, 외려 긁어 부스럼 꼴이다. 작가 본인에 대한 비판을 자초한 것은 물론 새 작품을 수록해준 잡지사 창비와, 그 회사 오너 백낙청에게 불똥이 옮겨 붙었다.

이 모든 게 대중을 너무 쉽게 본 때문이라는 게 필자인 내 판단이다. 어리숙한 듯 보이는 대중은 사안에 따라서는 놀라운 판관(判官) 노릇을 한다는 걸 당사자만이 모를 뿐이다. 사건의 앞뒤 전말은 이렇다. 창비는 며칠 전 신경숙의 중편소설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를 실은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발간했다.

신경숙이 지난 2015년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 처음이다. 신경숙은 발표문을 통해 사과까지 했지만, 그게 네티즌의 분노를 샀다.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가 발생했다"는 식의 어설픈 해명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 표절 파문 이후 칩거에 들어갔던 소설가 신경숙이 4년 만의 신작 발표와 함께 돌아왔다. /사진=조우석 제공

표절 파동은 창비의 구조적 문제

네티즌들은 한 작품을 통째로 베껴 쓰다시피한 글 도둑질인데, 그걸 어떻게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이라고 무책임하게 표현하느냐를 묻고 있다. 반성을 덜한 신경숙에게 멍석을 깔아준 창비와 백낙청 역시 도마에 올렸다. "창비? 창작과 비리"(발로X) "창비도 정신 차리세요."(써니nix) "다 늙어빠진 퇴물, 꼰데 백낙청이 문제다"(조봉X)…

왜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한 것일까? 대중은 다 알고 있다. 4년 전 백낙청이 신경숙의 표절 혐의를 부인했지만, 그게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 한 차례 소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결국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하차를 하며 겨우 비판의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게 불과 얼마 전 일인데, 자성해야 할 신경숙이 활동을 재개하고 창비는 그걸 돕는다? 사람들이 화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오늘 본질을 말하자. 표절 사건은 창비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한다. 세상이 알다시피 창비의 전매특허는 백낙청 평론의 핵심인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 두 개인데, 그게 이미 유통기간이 끝났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다.

즉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에 부합하는 작품이 나와 본 바 없고, 그게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가 지난 50년 동안 거의 없다. 때문에 창비는 그것과 무관한 작품을 ‘입양’해 창비의 이름을 달아 대중에게 팔아왔을 뿐이다. 그건 노골적 상업주의 전략인데, 90년대 이래 뚜렷한 현상이다.

90년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히트한 이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93년),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94년),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95년) 등이 그러하다. 이걸 두고 백낙청은 예전 한 인터뷰에서 "상업주의 운운은 가당치도 않다"고 발뺌했지만, 그 말부터 뻔뻔하다.

창비는 좌파 담론으로 명성을 얻고, 돈은 다른 구멍으로 벌어들이는 꼴을 왜 감히 부인하는가? 그리고 백낙청은 창비에서 나온 신경숙의 당시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를 보호하려고 그녀의 표절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나섰다. 사람들이 그걸 알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건 뻔뻔함, 그 이상이다. 자신들의 문학 노선에 부합하는 변변한 작품이 없었다는 건 창비 문학50년의 파산(破産)이자, 백낙청 문학의 허구를 보여준다. 그동안 백낙청과 창비는 시인 김수영-신동엽을 들먹이고 고은을 띄웠지만, 그게 전부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도 언급할 순 있지만, 그건 남로당 박헌영 노선에 충실한 '이적(利敵)문학'일 뿐이다.

   
▲ 백낙청은 2000년 6.15선언을 기점으로 평론가 본업 대신 정치판을 기웃댔다. 2005년엔 6.15선언실천남측위원장이란 감투를 썼고, 2012년 대선 땐 문재인 후보의 고문단의 멤버였다. 그는 현실정치판의 '숨은 신(神)'으로 등극했다. /사진=조우석 제공

정치판 '숨은 신(神)' 백낙청이 문제

그렇다면 창비를 두고 "저항의식의 저수지"라고 덕담(출판인 조상호)하는 건 모두 헛소리란 얘기다. 더욱이 평론만 있고, 작품이 없는 건 문학운동이 아니다. 그건 노골적인 정치운동이다. 즉 1966년 창간 이후 문화권력이 된 창비의 지적-도적적 권위란 원천 무효란 뜻이다.

실제로 지난 20년 백낙청의 행동반경이 그러하다. 그는 2000년 6.15선언을 기점으로 그는 평론가 본업 대신 정치판을 기웃대기에 바빴다. 2005년엔 6.15선언실천남측위원장이란 감투를 썼고, 2012년 대선 땐 문재인 후보의 고문단의 멤버였다. 백낙청은 현실정치판의 '숨은 신(神)'으로 등극했다. 해방 이후 문학을 밑천으로 가장 출세한 인물이 백낙청이다.

실제로 김대중 시절엔 문교장관 물망에 올랐고, 노무현 시절엔 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불과 2년 전 박근헤 정부 말 그는 다시 총리 후보로 이름을 올렸던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 백낙청은 연방제 통일의 전도사이며, 북핵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번 신경숙이 욕을 먹고, 표절 사건의 몸통 창비와 백낙청이 혼쭐나는 배경엔 그런 곡절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쳐선 안 된다. 다음 회 나는 백낙청의 아버지 백붕제와 큰아버지 백인제의 이야기를 꺼낼 참이다. 백붕제-백인제는 일제시대부터 변호사-의사로 명망이 높지만, 그 이전에 출판인이기도 했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문데, 바로 그 얘기다.

그들은 해방 직후 명동에서 출판사와 서점을 함께 운영했는데, 작심한 채 우익 쪽의 우량도서만을 펴냈다. 선대(先代)는 백낙청의 창비와는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백낙청은 가업(家業)이었던 출판업을 가지고 지난 반세기 엉뚱한 짓을 해온 꼴인데, 그 새로운 얘기에 관심 바란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