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으로 민심을 얻어야 천하를 경영, 가부장적 통치의 한계도 드러내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24)-이상국가를 꿈꾼 동양의 플라톤, 맹자(BC 372?BC 289?)맹자(孟子)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유교를 ‘공맹(孔孟)의 도(道)’라 일컬을 만큼 맹자는 공자의 가장 충실한 제자다. 공자가 무질서한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인(仁)과 서(恕)와 함께 예(禮)의 실천을 특별하게 더 역설했지만, 맹자는 인의(仁義)와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강조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맹자는 인(仁)을 주장한 공자를 계승하면서 의(義)를 추가로 부각시켰다. 양혜왕이 그를 처음 만나, “장차 무엇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묻자, “하필 이로운 것을 말씀하십니까? 역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한 데에 그의 핵심 철학이 드러난다. 인의(仁義)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한 역설이 <맹자>의 전편에 거듭된다.

인(仁)은 “남과 내가 하나 되는 마음”이다. 인은 마음의 본질이자 삶을 영위하는 근본 바탕이 된다. 의(義)는 인을 실천해내는 구체적인 행동원리다. 의는 불인(不仁)한 상황을 해소하는 행동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단서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知)의 단서가 된다. 바로 사단(四端)이다. 이 사단을 실천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이다. 이는 백성과 천자 모두에게 요구된다.

따라서 맹자는 정치 또한 인정(仁政)이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인정이 백성을 결집시키고 복종하게 만든다. 정치는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해야 한다. 제선왕이 희생되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고 불쌍히 여긴 그 마음을 격려하며 왕도정치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왕도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왕에게 인의(仁義)가 있어야 하고, 왕도정치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맹자의 왕도정치 방법은 무엇인가? 맹자는 제선왕이 자신에게 병통이 있어 왕도정치를 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회피하려 하자, 용기를 좋아하는 병통에는 세상을 평안케 하는 진정한 용기를, 즐거움을 탐하는 병통에는 백성과 함께 나누는 진정한 즐거움을 권고한다. 곧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주문한 것이다.

맹자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제후들이 땅과 백성을 늘리는 데에 몰두하는 패권적 행태를 질타했다. 나라의 크기가 왕업(王業)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민심은 곧 천심(天心)이기 때문이다. 요순(堯舜)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인의의 정치를 통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맹자의 왕도정치 주장을 실험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제후는 없었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야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주장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부동심(不動心)은 지언(知言) 즉 말을 아는 것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름으로써 체득된 것이다. 호연지기는 곧은 마음과 의(義)를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함양될 수 있다.

맹자는 왕도정치와 함께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사일과 일정한 재산이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 대학의 모 교수는 이 한 구절을 인용한 칼럼에서 “맹자가 복지 자본주의의 논리를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제시했다”며 황당한 추론을 했다.

한술 더 떠 “맹자의 항산론은 오늘날 유행하는 근로복지론(workfare)과 비슷하다”나? 이 정도면 시대착오와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 이런 것은 지나친 오독이자 과장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걸 소박하게 강조한 것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고전의 언설(言舌)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 주장의 논지와 가치를 현대적으로 음미하고 계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터무니없는 자의적 해석을 남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맹자는 공자의 충직한 제자답게 공자의 유가적 가치와 충돌하는 다른 제자백가에 대해 맹렬하게 공박했다. 농가와 묵자가 대표적인 공격 대상이다. 특히 남의 부모와 자기의 부모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說)과 소박한 장례를 강조한 묵자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었다. 묵자가 가족 윤리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윤리를 모색했다면 맹자는 철저하게 가족 윤리를 사회로 그대로 확장하려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맹자는 철저하게 묵자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예를 숭상했던 맹자에게 부모의 장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또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남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본질적으로 똑같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본(二本), 즉 근본이 틀리다는 것이다. 물론 맹자의 공박도 일부 일리는 있다.

하지만 묵자는 지나친 허례의식을 타파하려했고, 민초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전쟁을 통렬히 질타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의 중요성을 강조한 묵자 철학의 가치를 지나치게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한 것은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이는 기득권층의 가부장제 윤리로 왕들의 통치이념에 복무했던 유교 철학의 허점을 방어하려는 유교의 독단적 측면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신의 도를 펼치기 위해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와 맹자는 상당한 재력을 갖춘 기득권층이었다. 실제로 맹자는 팽갱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뒤에 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이며, 따르는 자 수백 사람을 거느리고, 제후에게 밥을 전달받아 먹는 것이 너무 사치스럽지 아니합니까?”라는 아픈 질문을 받기도 했다.

맹자가 이에 대해 “순임금이 요임금의 천하를 받으시되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으니, 자네는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묻지만 어쩐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궁색한 변명처럼 보인다.

어떻든 맹자의 왕도정치가 가부장적 통치 논리의 연장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제자백가의 철학이 대두되었던 것 자체를 지나치게 백안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맹자는 왕권에 대해 혁신적인 발상을 하기도 했다. “임금이 큰 허물이 있을 때 간하고 반복하여도 듣지 않으면 자리를 바꿉니다.”라며 귀척(貴戚)의 경(卿)의 입장을 제기했다. 즉 나라 정치에 공동의 책임이 있는 척실의 입장에서 볼 때 왕의 실정은 왕의 척실 중에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아가 천심을 얻지 못하면 이성(異姓)에 왕권이 넘어가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혁명으로 천자가 된 탕(湯)과 무(武)를 옹호한 이유도 같은 취지다. 즉 인인(仁人)이 불인(不仁)한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런 기개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국가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 이 때문에 일반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에게 신임을 얻어야 제후가 되고, 제후에게 신임을 얻어야 대부(大夫)가 된다.”는 설파로 나아간다.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기상이 느껴진다.

맹자 철학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성선설(性善說) 부분이다. 맹자는 고자(告子)와의 대담에서 성(性)의 내면적 선천성을 주장했다. 맹자는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보고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내재적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순(舜)이 숲속에서 살 때 거칠게 살았지만, 사람들의 선한 행동을 보고난 후 따라하는 행동은 강물이 터지듯 했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사단(四端)도 마음에 내재한 선(善)인 것이다. 하지만 맹자가 ‘인간이 본래 선하다.’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즉 본선(本善)인지 향선(向善)인지 적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본심(本心)을 잃지 말아야함은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인의와 왕도정치를 주장한 맹자의 철학은 당시 제후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인의를 표방하는 맹자를 겉으로는 대우하는 척했지만, 현실의 복잡한 위기 상황에 대한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맹자에게 국가 통치의 중요 직책을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후들이 '공맹의 도'를 겉으로 내세워 도덕정치를 하는 양 포장하면서도 실제의 통치에 유효한 법가 철학에 더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수용되지 못했던 것이 공맹의 인의철학의 한계였다. 유교의 가르침이 개인적 윤리철학으로서 더없이 훌륭한 가치체계를 제공했지만,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보위하는 생존전략으로서는 미흡했던 것이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2천여 년 동안 겉으로는 유교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법가의 혹독한 통치를 선호했던 양유음법(陽儒陰法)의 전통이 만들어 진 것도 유교의 내재적 한계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 윤리가 사회 윤리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가치체계가 필요했다. 개인과 개인 간의 이기심을 조율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도록 하는 새로운 규범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차선의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합리적 법률체계를 고민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개인의 윤리를 넘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체제를 궁구했다. 그리스인들이 민주정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고민과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다.

가족의 가치를 숭상했을 뿐, 그 구성원이 되는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중국 유교의 치명적 한계였다. 개인을 가족, 국가의 집단에 귀속시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은 개인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기보다 천명(天命)에 부응해야하는 수동적 존재에 머물게 했다.

이런 천하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개인적 윤리를 사회적 윤리로 확장하고, 나아가 국가 경륜의 철학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없는 공론(空論)이었던 것이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삼다 일제에 의해 패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유교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든 맹자는 도덕정치를 통해 이상국가를 건설하려했다. 특히 인간의 선함을 믿고 이를 윤리적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은 분명하다. 인간 심성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백성들을 인의(仁義)로 교화하고 왕들에게 왕도정치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인의(仁義)와 도덕이 쇠락해진 현대 사회에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일깨워주는 맹자의 철학은 여전히 수양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추천도서 :『맹자강설』, 이기동 역해, 성균관대학교출판부(2012, 3판 2쇄), 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