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6책도 국보로 추가 지정…2219책
   
▲ 부여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기 [사진=문화재청 제공]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백제 왕실 사찰인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금당(金堂) 앞 목탑 터 사리공(舍利孔·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지난 2007년에 출토된 국내 최고(最古)의 현존 사리기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문화재청은 서기 577년에 만들어졌고 금제 사리병, 은제 사리호, 청동제 사리합 세 겹으로 구성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를 국보 제327호로 지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사리기는 참된 수행을 한 부처나 승려 몸속에 생긴다는 구슬 모양 유골인 사리를 보관한 용기를 지칭하는데, 왕흥사지 사리기는 명문이 있어 제작 시기가 명확하고, 연대가 빨라 선구적 위치에 있으며, 역사성과 희소성이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청동 사리합 겉면에는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립찰본사(子立刹本舍)/리이매장시(利二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례 지낼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됐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사리기가 백제 제27대 임금 위덕왕(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고자 발원한 왕실 공예품임이 확인됐고, 백제 법왕 2년(600)에 축조해 무왕 35년(634)에 낙성된 것으로 전해진 왕흥사의 실제 창건 시기가 정유년인 위덕왕 24년(577)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리기는 미술사 측면에서도 형태와 기법 완성도가 매우 높다고 알려졌다.

단순하고 단아한 모습, 보주형(寶珠形) 꼭지, 주위를 장식한 연꽃 문양은 525년에 조성한 '공주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과 639년에 만든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조형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왕흥사는 부여 낙화암에서 금강 건너편에 보이는 사찰 터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6년부터 조사, 건물 배치를 확인하고 다양한 유물을 출토했다.

한편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거나, 국보 지정 이후 국내에 들어온 '조선왕조실록' 96책도 추가로 국보로 지정됐다.

정족산 사고본 7책, 오대산 사고본 1책, 적상산 사고본 4책, 봉모당본 6책, 낙질 및 산엽본 78책이다.

특히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 넘어갔다고 알려졌으나, 조사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각각 1책과 3책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부속 건물로 건립한 봉모당(奉謨堂)에 보관한 어람용(御覽用) 실록인 봉모당본도 처음 존재가 드러났는데, 푸른색 비단으로 장정하고, 첫면에 '봉모당인'(奉謨堂印)이라는 인장이 있는 점이 특징으로, 역대 국왕과 왕비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은 총 2219책이 됐고, 지정 번호도 일부 조정됐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제151-1호 적상산 사고본이 1187책,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이 소장한 제151-2호 태백산 사고본이 848책, 국립고궁박물관이 보관하는 제151-3호 오대산 사고본이 75책,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는 제151-4호 적상산 사고본이 4책이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제151-5호 봉모당본이 6책,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국보 제151-6호 낙질 및 산엽본이 99책이다.

낙질본은 본래 사고(史庫)에서 제외한 중간본(重刊本·임진왜란 이후 다시 간행한 책) 실록이고, 산엽본(散葉本)은 정족산 사고본 실록 낙장을 모은 책이다.

문화재청은 "국보 추가 지정으로, 조선시대 4대 사고 실록이 모두 국가지정문화재가 됐다"며 "조선왕조실록은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 관리 정신을 증명해 주는 매우 의미 있는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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