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재명, 영화 '비스트'서 형사 민태 역 맡아
"첫 상업영화 주연? 주어진 역할에 최선 다할 뿐"
"'비스트',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영화…가늠할 수 없었죠"
[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지난해 10월 영화 '명당'으로 첫 언론 인터뷰를 가졌을 당시 유재명은 "무명배우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이자 스스로를 향한 외침이었을 테다. 대중에게 '유재명' 이름 세 글자를 알리기까지 15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 상업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신뢰받는 배우가 됐지만, 그는 대학로의 고수들을 우러러본다며 자신을 더욱 담금질하고 있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유재명은 적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생각에 잠기는 눈빛이 깊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연극 무대, 브라운관,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며 연기만 보고 살았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양념 없이 담백했고, 한 손에 펜을 쥔 채 내놓는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감이 묵직했다.

"전 운이 좋아서 대중에게 알려졌을 뿐이고, 각자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 고수들의 공연을 보러 가면 정말 멋져요. 정말 많은 동료들이 대학로에 있죠. 그 분들이 제게 '잘됐다' 격려해주시면 감사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영화 '비스트'의 배우 유재명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NEW


유재명은 '응답하라 1988'(2015)의 동룡이 아빠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 '내부자들'(2015), '대호'(2015), '4등'(2016), '브이아이피'(2017), '명당'(2018), '영주'(2018) 등 스크린은 물론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2017), '비밀의 숲'(2017), '라이프'(2018), '자백'(2019)에서 명품 연기력을 선보이며 흥행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했다. 미디어에서 그의 입지는 4년 만에 완전히 달라졌다. 영화 '비스트'로 첫 상업영화 주연을 맡은 그에게 부담감은 없을까.

"주·조연의 경계는 없다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요. 제가 선택한 것과 제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물론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닌데, 같이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편해졌어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도 있었고."

'비스트'는 희대의 살인마를 잡을 결정적 단서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은폐한 형사 한수(이성민)와 이를 눈치챈 라이벌 형사 민태(유재명)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재명은 섬세한 연기로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한수와 숨막히는 심리전을 펼치며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시나리오를 보면 확신은 아니더라도 감을 갖고 해석하는 게 보통인데, '비스트'는 당최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살인마를 쫓는 범죄 형사물인데 그 흔한 회식 장면 하나 없고 형사들의 애환, 유머, 인간적인 모습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극한까지 상황을 밀어붙이니까 '끝은 어디일까' 가늠할 수 없더라고요."


   
▲ 영화 '비스트'의 배우 유재명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NEW


유재명의 말처럼 '비스트'는 인물 간 관계와 그 관계의 역전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끊임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유재명은 "악당을 쫓고 사건을 해결하는, 시원한 해소감을 주는 영화는 너무나 많은데 '비스트'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며 "민태는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어서 이 작품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우리가 선택한 걸 관객분들이 이해하고 공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를 보고 나면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난 욕망을 숨기고 있는지, 소통하고 있는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괴물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난 과연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그런 생각을 건드리는 영화라서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의에 대한 비뚤어진 우월감과 질투심으로 얼룩진 민태의 입체적 캐릭터 때문에 인물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유재명은 "감독님과 민태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공유했는데 대화를 하니 더 헷갈리더라. 한수를 싫어하는 민태의 감정과 돌발적인 행동들은 설득적인 개연성보단 인간의 성격적 결함에 집중한 것 같다"며 "불친절한 서사가 있지만 지켜보시면 '이 영화 다른데'라고 느끼시지 않을까 싶다"고 귀띔했다.


   
▲ 영화 '비스트'의 배우 유재명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NEW


상대 역으로 만난 이성민과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번 작품을 통해 이성민과 처음 만난 유재명은 "정말 좋아하는 배우이자 선배님이었다"며 "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너무 영광이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밝혔다.

"이성민 선배님은 상대 배우의 눈높이를 맞춰서 어떤 것도 스스럼없이 만들어내세요. 그래서 안도하면서 마음껏 연기할 수 있었어요. 연기도 합을 맞춰야 하는 작업인데, 밸런스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촬영 현장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영화의 분위기는 까끌까끌하지만 화기애애한 현장이었고, 그 중심에는 이성민 선배님이 계셨어요."


   
▲ 영화 '비스트'의 배우 유재명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NEW


지난 4년 동안 어떤 배우보다도 열심히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간 유재명. 인터뷰를 하는 1시간 중 소소한 이야기를 공유하거나 색다른 이면을 탐구하기엔 그의 생활과 취향 대부분이 작품 활동에 편중돼 있었다. 연기를 하며 동력을 얻는다는 그는 "재충전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며 털털하게 웃었다. 동네를 산책하거나 한잔 걸치는 것이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최근 다작을 하다 보니 과소비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배우는 해가 지나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하면서 나이를 먹거든요. 한 사람의 삶을 살고, 계절이 바뀌면 다른 옷을 입고… '비스트'를 통해 또 한 살을 먹게 됐네요. 부담스럽진 않아요. 자연스러운 거니까."

현재 영화 '킹 메이커: 선거판의 여우' 촬영에 한창인 유재명은 새 드라마, 단편영화가 고프다며 여전한 연기 열정을 드러냈다. 올 하반기 영화 '나를 찾아서' 등 많은 작품의 개봉을 앞둔 그는 최근 몇 년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가 신기하다며 쑥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몇 년 사이 한 번도 안 해본 남편·아빠 노릇, 효도를 하다 보니… 떠돌이 생활이나 하고 전 이런 것들을 못 할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는 게 신기해요. 저를 드러내는 게 아직은 부끄럽고 낯설어요. 적응하고 싶고요. 좋은 작품 만나서 열심히 연기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제 삶의 목표입니다."

[미디어펜=이동건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