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정 외교안보부장
[미디어펜=김소정 기자]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30대기업 총수들과 간담회를 갖고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일본정부도 화답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날 청와대 회동 이후 문 대통령을 만난 기업인들이 오히려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 일본기업들을 민간 차원에서도 설득하겠다”고 말한 것이 전해지고, 문 대통령이 모두발언으로 제시한 단기적 경제대책도 장기적 방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차분하게 외교적인 해결을 모색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므로 일단 문재인정부가 기업과 비상체제를 갖추는 것 외에도 대일외교를 가동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업인들과 만나 일단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해 청와대‧정부가 주요그룹 최고경영자들과 상시 소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고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주력산업의 핵심 기술‧부품의 국산화 등 산업구조 개선을 위해 세제‧금융 등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정부 지원도 약속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를 향해 “더 이상 막다른 길로 가지말라”며 추가 경제보복 조치를 중단할 것을 압박했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언급한 우리정부의 대북제재 위반 의혹에 대해서도 “아무런 근거없이 대북제재와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명확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이번 규제 조치에 대해 처음 한국의 대북제재 위반 의혹을 언급하더니 독가스 사린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심지어 전략물자 밀수출 의혹까지 들고 나와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이런 주장의 배경에 우리 산업통상자원부가 마땅히 했어야 할 ‘한‧일 간 화학물질관리 회의’를 불이행한 사실이 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대표들을 초청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청와대

일본정부는 지난 1일 수출규제 발표를 하면서 “문재인정권이 들어선 이후 화학물질 관리를 둘러싼 한일 간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는 “일본의 담당국장이 공석이어서 그랬다”고 반박했지만 곧바로 일본 경제산업상은 당시 실무 간부이름까지 공개하며 한국의 주장을 재반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청와대가 적폐청산에 집중하면서 대기업과 일본까지 그 대상으로 몰고 있을 동안에도 정부부처는 제 역할에 충실해야 나라와 경제가 온전할텐데 일선의 실무 공무원까지 일본을 경시하는 태도로 당연히 해야 할 업무에 태만한 결과는 아닌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한국의 전략물자 밀수출 의혹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노가미 고타로 관방 부장관이 나서 “한국의 수출관리에 우려할 만한 사례가 있고, 이번 조치가 WTO 규정에 부합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더구나 이번 발언의 근거는 국내의 한 의원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제출받은 리스트라고 한다.

아베정권은 한국기업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계획하면서 치밀한 ‘안보 프레임’을 짠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리스트’에 해당하는 나라 중 한국에 대해서만 수출규제를 취하면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예상돼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이번 경제보복은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판결 가능성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준비됐기 때문이다. 

반면, 문재인정부 들어 2018년 10월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배상결정은 한마디로 아무런 대책 없는 최종판결이었다. 이전 정부를 부정하는 문재인정부라 하더라도 역대정권마다 진통을 겪은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안일했다. 이승만정부를 비롯한 과거 보수정부의 역사도 잇는다는 책임감이 없는 문재인정부의 대표적인 패착이 지금 사태를 부른 셈이다.

더구나 박근혜정부가 고심해서 미뤘던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판결을 문재인정부 들어 결단할 계획이었다면 집권 초기부터 주일 한국대사를 중량감 있는 인물로 발탁해 일본 정치권과 교류를 강화하는 등 외교력을 집중시킬 필요도 있었다. 한마디로 문재인정부에서 지금까지 주장해온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문제와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분리하는 투트랙 정책은 가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아베정권의 ‘안보 프레임’을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미 대북제재와 관련해 석탄 반입설이나 유류 환적설에 연루돼 있을 정도로 북한 문제에서 안일하다는 지적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징용 문제 협의에 있어서도 한국정부는 처음 일본정부의 제의도, 7월18일 설치기한이 만료되는 제3국 중재위원회도 모두 거부한 사실이 있다.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이 30대기업 총수들과 회동할 것이 예고되자 일각에서는 지금 기업인들을 만날 때가 아니라 일본과 양자협의를 진행할 대책을 내놓을 때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많았다. 이제 문재인정부는 지난 6월19일에 제안했던 ‘한일 기업이 자발적으로 배상한다’는 기존에 제시한 안에서 일보 진전된 협상안을 갖고 양자 협상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전문가인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이번 사태의 원점이므로 정확하게 원점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강제집행을 유보하고, 기금 조성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정부간 협상 재개를 요구해야 한다”면서 “한일 기업이 배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국정부의 역할을 추가적으로 명시하고, 해결 시한까지를 담은 협상안을 제시하며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정부가 그나마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세차례나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3대 독재체제, 최악의 인권 실태 등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야한다. 일본과도 ‘반일 프레임’, ‘친일적폐 청산’이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경제‧안보 협력이란 국익을 우선해서 적극적으로 ‘극일’(克日)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