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전에 90년대 민중사학부터 조선시대 짝사랑
지식정보 총체적 오염이 문제…해결 없이 앞날 없어
   
▲ 조우석 언론인
한국인이 조선시대와의 사랑에 빠졌고, 그 변화를 연출한 것은 영화 장르란 점을 지난 주 칼럼에서 밝혔다. 일주일 전 개봉한 '나랏말싸미'에서 보듯 우리영화판은 거대한 '조선시대 판타지'가 분명한데, 만약 이걸 구한말의 단재(丹齋) 신채호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망국 훨씬 전부터 성균관에 입학해 한학을 공부했던 단재 신채호조차 "일찌감치 육경(六經)을 불 싸질러 버려야 했다"며 탈 조선, 탈 전통을 외치지 않았던가. 조선왕조가 얼마나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왕과 신하, 그리고 전통을 가졌던가를 가혹하게 지적했던 것인데, 그게 맞다. 조선왕조는 엄연히 실패했고, 그래서 일제에 먹히고 만 나라다.

단재만이 아니다. 한문학자 김경일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펴내고 유교문화의 위선을 고발해 베스트셀러로 떴던 것이 딱 20년 전인 1999년이다. 지금 생각하니 김경일이 마지막이었고, 1990년대를 분수령으로 해서 조선시대와 선비정신 찬양이 이미 봇물 터졌다.

"조선왕조 왜 실패했나" 아무도 묻지 않아

학계 흐름이 그랬고, 세상도 그쪽이었다. 진유(眞儒) 즉 참선비란 말이 슬금슬금 쓰였고, "선비는 학식과 예절을 아는 고결한 인간형"이라는 식으로 역사학자 고병익이 바람 잡았다. 그걸 대중화한 게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정옥자인데, 그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선비정신>(2002년 현암사)에서 선비와 덕목과 이미지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선비란 유교이념의 인격적 주체란 식이다. 왜 이런 흐름이었을까? 유교자본주의란 담론이 국제사회에 첫 등장했던 게 1970년대인데, 그 영향도 있겠지만 국내적 요인이 훨씬 크다. 이른바 민중사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게 1990년대 이후이고, 그들은 특히 내재적 발전론에 목숨을 걸었다.

일제가 남겨준 식민사관의 상처를 씻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결과 조선 중후기 상업이 발달하는 등 독자적으로 뻗어나갈 동력을 충분히 갖췄다는 '학문적 자뻑'을 무럭무럭 키웠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18세기 이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등 문화적 흐름도 그쪽이며, 그게 조선문화의 르네상스를 펼쳤다며 저들은 환호작약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저들은 명백히 실패했고, 그래서 끝내 식민지로 굴러 떨어진 조선 후기사회를 민중사학은 한없이 떠받든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직전까지 조선왕조를 거의 '역사의 낙원'으로 확대시킨다.  이통에 구한말 국권을 빼앗긴 최악의 고종까지도 개혁에 매진했던 계몽군주로 묘사한다.

그런 인식의 배경에는 물론 자본주의 맹아론이 똬리 틀고 있다. 조선 후기는 독자적 근대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멋진 사회였다는 것이다. 일제가 침범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름다운 보석' 조선왕조는 서유럽 같은 근대문명을 개척하고도 남았으리라는 가정이다. 이쯤되면 거의 판타지 소설인데, 남은 건 흉포한 제국주의인 일본만 탓하면 된다.

   
▲ 8년 전 개봉했던 영화 '각시투구꽃의 비밀' 스틸 사진. 조선시대 탐정물 3부작의 하나이며, 5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한국인을 조선시대와의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영화 장르이지만, 첫 원인 제공은 민중사학계가 했다고 봐야 한다. /사진='각시투구꽃의 비밀' 캡쳐

이런 게 민족주의 울분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볼과하지만, 그걸 누구도 감히 지적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정작 물어볼 것을 놓친다. 조선왕조 역사실패는 무엇 때문이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통렬한 자기반성이 없이 남의 탓만하는 역사관을 키운 것이다.

동시에 헛된 민족적 자부심으로 땜질한 역사관인데, 그 결과 일제시대를 보는 눈도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다. 나쁜 강도 일제가 우리를 어떻게 수탈해갔고, 친일파가 어떻게 판을 쳤던가에 대한 개탄으로 내내 이어진다. 친일파하면 부르르 떠는 체질이 이때 굳어졌다. 해방 이후사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로 균형을 잃는다.

친일파들이 친미 사대주의자로 모습을 바꿨으니 끝내 정의가 실패했다는 식이다. 1950년대 이승만, 1960~70년대의 박정희도 기회주의가 득세한 불의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고정관념이다. 분단시대에 통일은 비원의 꿈이고, 근현대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어처구니 없는 자본주의 맹아론

그런 신탁(神託) 수준의 주장이 승리하면서 국사학계 역사관은 틀을 완전히 잡았다.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 운동권이 학문세계로 치고 들어온 것이고, 드디어 1990년대 이후 헤게모니를 쥔 것이다. 이게 내가 파악한 한국사회의 숨은 진실이다. 한국인이 조선시대와의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은 영화 장르라고 밝혔지만, 첫 원인제공은 엄연히 국사학계가 한 것이 맞다.

그 결과 20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영화 세계가 지금은 일상이 되고 흥행에도 성공하는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학문 등 지식정보가 온통 오염되니까 끝내 그 아래의 영화 장르까지 망가진 꼴이다. 당초 잘못된 학문적 판타지를 판을 키운 게 지금의 한국영화다.

반복하지만 지난 주 개봉한 '나랏말싸미'의 경우 분명 조선시대 영화의 한 정점을 찍을 것이다. 한국인의 조선시대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조선시대를 '좋았던 옛날'로 포장해왔고, '일제라는 강도가 침략하기 전 민족문화를 꽃 피운 시대'로 찬양해왔는데, 그 핵심에 있는 인물 세종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안타깝다. 그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의 말대로 '환상의 나라'에 불과하다. 한국관객의 성향이란 민족주의 감성에 충만한데, 그걸 건드린 게 '나랏말싸미'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그 때문이다. 그런 나약한 정신승리로, 자본과 대중이 만들어내는 퇴행적인 조선시대 사랑 따위로 21세기 앞날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오늘 그걸 묻는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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