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3.1만세길'...화성 제암리와 안성 '만세고개'를 가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지난 13일 경기관광공사는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족 역사여행 추천코스로 경기도내 6곳을 추천했다.

'역사의 순간으로 떠나는 나라사랑 시간여행'을 테마로, 인기 있는 피서지나 관광지보다는 치열했던 독립항쟁 역사의 현장에서,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다.

추천된 곳은 화성의 '3.1만세길', 안성의 3.1운동기념관, 김포의 독립운동기념관, 양평의 몽양여운형기념관, 광주의 신익희 생가, 안산의 최용신기념관이다.

이중 3.1만세길과 안성 3.1운동기념관을 17일 다녀왔다.

   
▲ 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 [사진=미디어펜]

역시 경기도 주최, 경기관광공사 주관으로 진행중인 '2019 경기그랜드투어'의 일환인 '1919년의 함성 속으로' 행사를 통해서다.

경기그랜드투어는 경기도의 역사, 문화, 자연, 평화를 주제로 하는 버스투어 프로그램으로, 22개 시군과 함께 50개 주요 관광지와 147개소의 관광지를 연계, 총 길이 1089km의 여행코스이며, 올해는 지난 6월부터 오는 11월까지 진행된다.

경기도이야기버스 여행, DMZ 평화관광 통일과 만나다, 미술관 박물관 연계투어, 3.1운동 100주년 기념투어 등 다양한 테마로 진행중이다.

17일에는 화성 3.1운동만세길과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안성 3.1운동기념관 및 광복사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KBS-TV 역사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중인 역사학자 심용환 교수의 특강이 2차례나 열려, 더욱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서울 교대역에서 아침 8시에 일행과 합류, 화성으로 내달렸다. 9시30분 쯤 3.1운동만세길 방문자센터에 도착한다.

3.1운동만세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화성시에서 조성한 트레일코스로, 3.1운동 당시 선조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위치며 걸었던, 31km의 길이다.

야간 횃불시위를 벌였던 쌍봉산을 중심으로 만세시위 현장이던 수촌리교회, 옛 장안면사무소터, 옛 우정면사무소터, 현각리 광장터, 화수리 주재소터, 개죽산 홧불시위터 등 당시의 현장들을 잇는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방문자센터와 화수리 주재소터가 있는 화수초등학교, 차병혁 선생 생가 3곳만 들리기로 했다. 학살의현장 수촌리교회도 가보려다 포기...

만세길의 시작점이 방문자센터다.

방문자센터는 '2019 아이코닉 어워드' 건축분야 대상을 수상한 건축작품이다. 바닥에 깔린 검은 화산석은 일제의 만행으로 불타버린 마을을 상징하고, 벽돌을 삼각뿔모양으로 쌓아올린 높이 6m의 기념비에는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방문자센터에서 우정면 화수2리 화수초등학교는 지척이다.

교문 옆에 3.1운동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서철모 화성시장의 꽃다발이 놓여있다. 아마 15일 광복절 날 바친 것이리라...

화수초교는 외견상 특별할 것 없는 시골학교다. 그 운동장 한켠 농구골대 있는 곳이 과거 만세시위 군중들에게 불탔던 화수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주재소에 근무하던 순사 가와바타는 당시 성난 군중들에게 처단당했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길옆 비닐하우스 옆에 달린 수세미가 노오란 꽃을 피워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까운 차병혁 생가로 간다.

만세길에는 차병혁 선생 생가와 차희식 선생 집터가 나란히 있다. 이 곳은 차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차병혁 생가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날이 가물어 물이 마른 버들저수지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동네 안으로 들어선다. 입구에 장승 하나가 서 있는데, '천하대장군'은 없고 '지하여장군'만 있다.

사람보다 동네 개들이 맞아주는 한적한 동네 안쪽에, 차병혁 생가가 있다.

생가는 어릴 적 시골마을에서 흔히 보던 흑벽 집으로, 곳곳이 기울고 벽 표면이 떨어져나가 다소 위태롭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하고, 그 뒤에 현대식 농가주택이 들어서있다.

일행은 바쁘게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아, 제암리...일제의 잔학무도한 탄압과 학살, 반인도적인 참극의 현장이다. 화성지역의 만세시위가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하게 확산되고 무력항쟁으로 발전하자,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그 확산을 저지하고자 한 만행이다.

1919년 4월 15일 이라타 중위가 보병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와,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교회로 몰아넣은 뒤, 건물에 불을 지르고 총을 난사,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를 보고 달려온 아녀자 2명마저 총검으로 난자했다.

이 참상은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캐나다인 선교사 겸 언론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제 나라보다 더 이 나라를 사랑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석호필'이란 한국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분이다.

제암리 유적지 한 켠에, 자전거 옆에서 카메라를 든 그의 동상이 바위 위에 앉아있다.

유적지 한 가운데에는 3.1운동순국기념탐이 우뚝 서 있고,  그 옆에 대형 안내판이 있다. 왼쪽 길로 안으로 들어가면, 제암교회 뾰족탑이 우뚝 솟은 옆으로 3.1운동순국기념관이 있고, 그 위로 당시 이 곳에서 순국하신 23위 순국선열들의 합동묘소가 있다.

제암리에선 심용환 교수의 첫번째 특강 '정의와 평화의 마중물, 3.1운동과 제암리사건' 강의도 진행됐는데, 마침 이 곳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들어 더욱 의미 깊었다.

특강 후 기념관과 유적지를 둘러보고,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그리고 바로 화성을 떠나 안성으로 향했다.

안성시 3.1운동기념관이 목적지다.

   
▲ 안성 3.1운동기념관 전시관 입구

안성에서의 3.1만세운동은 화성보다 더 격렬하고, 본격 무력항쟁의 성격을 띄었다. 일제조차 화성과 안성의 만세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전국 3대 항쟁지'로 꼽았을 정도였는데, 나머지 2곳은 모두 북한(평북 의주, 황해도 수안)에 있다.

안성에서는 그해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약 6000여 명이 안성 전역에서 궐기, 일제 순사들을 처단하고 이틀 간 일본인들을 안성군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해방구'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하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26명이 순국하고 177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가옥 276호가 불탔다고 한다.

그 처절한 항쟁의 중심지가 '만세고개'다. 고개 이름이 아예 만세고개로 바뀌었다.

그 고개 위에 세워진 것이 3.1운동기념관이다.

고개 맨 위 정상에 기념탑이 서 있고, 그 밑에 안성지역 순국선열 32명과 애국지사 284명의 위패를 봉안한 광복사가 있다. 그 아래 광장 왼쪽에는 당시 군중의 습격으로 불탔던 양성주재소와 양성우편소 모형이 있다.

주재소 안에는 일제 경찰에 의해 잔인한 고문을 당하던 애국지사의 고통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광장 오른쪽은 전시관이다.

입구 왼쪽에는 당시 민중을 잡아 가뒀던 감옥방이 재현돼 있는데, 특히 사람 한명이 겨우 들어가 서있어야 하는,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감옥 겸 고문도구인 '벽관'이 마치 질식할 것만 같고, 다른 방엔 고문도구들이 놓여있다.

반대쪽에는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나무 함거와 곤장 맞는 곳, 고문도구들이 즐비하다.

전시관 안에서 심용환 교수의 2번째 특강, 태극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광복사 올라가는 계단에 우리 일행이 모여서서 손에 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는 장면을 OBS-TV에서 촬영해 가기도 했다. 그날 저녁 뉴스에 나왔다는데, 보지는 못했다.

광장 한쪽에는 청동조각작품들도 관람객을 맞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 큰 손바닥 집게손가락 위에서 노는 어린이, 우주를 상징하는 큰 구를 그 앞에 앉아서 가리키는 아이...그 아래층엔 억압받는 여성의 쪼그려 누운 주위로 희망의 새싹들이 움튼다.

오후 4시를 전후에 안성 3.1운동기념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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