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 앞·봉분서 각각 확인…"국내 첫 사례, 무덤 수호 의미 추정"
   
▲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발굴된 묘표석 2점. 사진 가운데 아래쪽에 석비형 묘표석, 오른쪽 위에 석주형 묘표석 [사진=문화재청 제공]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서동요' 주인공인 선화공주 무덤으로 전해지는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길이 1m가 넘는 묘표석(墓表石) 두 점이 발견됐다.

백제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유물은 각각 석실 앞과 봉분에서 나타났으며, 국내에 전례가 없어 주목된다.

그러나 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릉에서 인골이 담긴 상자가 나온 것과 달리, 소왕릉에서는 피장자에 대한 단서가 확인되지 않았다.

전북 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문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無字碑) 형태의 묘표석 두 점을 찾았다고 19일 밝혔다.

묘표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과 유사한 석비(石碑) 형태와, 원뿔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석주(石柱) 형태로 구분된다.

석비형 묘표석은 석실 입구로부터 약 1m 떨어진 지점에서 비스듬하게 선 채로 발굴됐고, 크기는 길이 125㎝·너비 77㎝·두께 13㎝며, 석실을 향한 앞쪽은 정교하게 다듬었으나, 뒷면은 다소 볼록하다.

석주형 묘표석은 봉토에서 누운 채로 출토됐고, 길이 110㎝·너비 56㎝의 기둥 모양이며, 둥근 사각형 몸체다.

최완규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국내 왕릉급 고분에서 무자비 묘표석 두 점이 발견된 첫 사례"라며 "묘표석을 정밀히 조사했으나, 글자는 없었다"며 "무덤 석재들과 재질이 비슷하고, 일부러 거대한 돌을 무덤 안에 넣을 이유가 없으므로, 백제시대 묘표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석실과 봉토를 지키는 진묘(鎭墓)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를 위한 시설물 같다"며 "대왕릉은 없고 소왕릉에만 있는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백제 왕실 묘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높이 2.7m이며,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시루떡처럼 번갈아 쌓아 올린 판축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지난해 조사한 대왕릉에서도 확인됐다.

구조는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의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으로, 석실 단면은 육각형이며 석실의 길이는 340㎝·폭 128㎝·높이 176㎝로, 대왕릉보다 길이·너비·높이가 모두 약 50㎝씩 짧다.

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에 이르는 연도(羨道)는 짧은 편이며, 폐쇄석은 대왕릉처럼 두 겹으로 설치했고, 남쪽으로 뻗은 무덤길인 묘도(墓道)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로 조사됐으며, 현재까지 드러난 묘도 길이는 약 10m다.

관심을 끈 피장자 추정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작년 대왕릉 조사에서는 관대 위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됐고, 사망 시점이 620∼659년이고 60대 남성의 뼈라는 분석 결과로,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 무덤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렸다.

최 소장은 "소왕릉 주인이 선화공주인지,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에 등장하는 사택적덕의 딸인지, 아니면 제3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180m 거리를 두고 조성한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성된 쌍릉은 오금산 줄기가 끝나는 남서쪽 능선에 위치, 대왕릉은 익산에 미륵사라는 거대한 사찰을 세운 무왕, 소왕릉은 무왕 비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혔다고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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