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비하와 애국교육 부재서 비롯, 태극기대신 한반도기 대신할 수도

   
▲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서울시교육청이 보급하는 ‘3도 낮춘 애국가’가 장송곡 풍의 힘 빠진 애국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문용린 교육감 시절 추진됐던 사안이고, 변성기 학생들에게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교육 차원의 배려였을 뿐이라는 변명도 들린다.

하지만 전교조가 품고 있는 음험한 교육철학의 배경을 익히 가늠하는 우리들에게 반신불수 애국가의 저의를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애국가 문제는 학교 교실을 둘러싼 기술적인 논쟁이자, 동시에 정치적 논쟁이라는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애국가 논쟁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전후 교육현장에서 사라진 애국교육의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우심해지고 본격화된 반(反) 대한민국 정서를 어떻게 치유하고 헌법적 가치를 높일까하는 큰 그림 속에서 파악하는 게 먼저다. 걱정은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공권력이 지금처럼 하나씩 좌파에게 양보를 하다가는 ‘애국가 흠집내기’에 이어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旗)를 대신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될 지도 모른다는 게 필자의 음울한 예측이다.

사실 지난 10년은 ‘애국가 수난사’‘애국가 훼손의 역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2003년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인 유시민이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것은 군사독재와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아 생긴 파시즘의 잔재”라는 충격적 망언을 했다. 애국가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뜻의 독설도 이때 함께 내뱉었다. 이후 이어진 각종 민중의례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례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만든 게 2010년의 일이다.

 

그러나 통진당 의원 이석기가 2년 뒤 그걸 다시 정면에서 부인하는 발언을 해 종북 논란에 불을 붙였다. 그는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며, 차라리 아리랑을 부르자”는 엉뚱한 제안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음정을 낮춘 애국가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연출이 있고, 그게 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펴져있는 반 대한민국 정서 속에서 차곡차곡 움직인다고 관측하는 게 합리적이다.

 

가수 장사익의 ‘3도 높은 애국가’도 있다

논의의 출발로 필자는 ‘3도 낮춘 애국가’ 이전에‘3도 높인 애국가’가 있다는 사실부터 일깨워 드리고 싶다. 그건 ‘계면쩍은 듯 입만 달싹거리며 부르는 지금의 애국가’, 애국적 고양감을 공유하기 힘든 지금의 애국가 제창 태도에 의문을 품어온 한 유명가수의 시도였다. 가수 장사익이 그 분인데, 그는 1년 반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경청할 만한 발언을 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때의 대화를 올 3월 단행본으로 출간된 인터뷰집 <인생 부자들> (중앙M&B 출판사, 33~34쪽)에 그대로 실은 것이다.

조우석 질문
장사익 특유의 절절한 목소리는 참 놀랍습니다. 아픔을 딛고 나오니까 감동이 큰 걸까요?
장사익 답변
엊그제(지난해 봄) 동유럽 슬로바키아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한국과의 수교 10년 기념모임을 힐튼호텔에서 갖는데 저보고 애국가를 부르라고 해서 갔었지유. 보통 우리는 애국가를 계면쩍은 듯한 태도로,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살금살금 부르는 게 습관이 됐죠. 그런데 왜 그렇게 불러야 합니까? 저는 대뜸 한 3도를 높여서 불렀습니다. 이렇게요.(그가 직접 앞의 몇 소절을 불러줬다. 놀라운 일이다. 그가 부른 “동해물과 백두산 마르고 닳도록”은 가슴이 다 뻥 뚫린다. 그리고 없던 애국심까지 일으켜세우는, 무언가 힘과 에너지가 살아있다.)
조우석 질문
애국가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대박 애국가이구만요. 그전에 무반주 애국가를 불러 미 대사의 감사패를 받았던 일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장사익 답변
그때가 2011년 7월 미국 독립 기념일 파티가 서울 정동 대사관저에서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애국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당시 대사였던 캐슬린 스티븐슨이란 분이 그 분이쥬. 한국이름으로 심은경을 쓰는 그 분 말유. 그 분이 제 공연을 한 번 보러 온 뒤 저랑 친해진 사이인데, 그날 파티에서 전례 없이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합창에 앞서서 우리나라 애국가를 제가 불러달라는 겁니다.

   
▲ 자유경제원이 4일 <교육쟁점 연속토론회-애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왼쪽부터 왕치선 작곡가,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현진권 자유경제원장,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조형곤 21세기미래교육연합 대표

해외 주재국에서 파티를 할 때는 자기네 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주재국 국가는 나중에 하는 게 외교 관례랍니다. 그걸 깨고 스티븐슨 대사가 우리 애국가를 먼저 하도록 일부러 배려를 해준 겁니다. 저야 뭐 씩씩하게 불렀쥬. (당시 넘치는 기백의 애국가 열창이 서울에서 공부하는 미국 학생 수십 명이 합창한 미국 국가의 에너지를 가히 압도했다며, 신문 기사로도 소개됐다. 훗날 스티븐슨 대사는 장사익에게 양국의 우정을 증진한 공로로 감사패를 전했다).”

가수 장사익이 그러하듯 필자 개인적으로 이 사안은 오랜 관심의 하나였다. 왜 우리는 애국가를 입만 달싹거리며 마지못해 부르듯 할까? 국가의 명절을 맞아 공식적인 자리에서 국민됨을 확인하는 의례가 이렇게 멋쩍은 듯 대강 진행돼도 되는 것일까? 생각해보시라.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 같은 정부 공식 행사에서 각종 국민의례 때에 우리의 태도는 항용 그래왔다. 장내 스피커에서 반주가 울려나올 때 대부분은 옆 사람에게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준에서 웅얼거리는 걸로 그친다.

왜 한국인은 애국가를 입만 달싹거리며 소극적으로 부를까?

국가대항 축구대회가 열릴 때도 그런 태도는 여전하다. TV로 비춰지는 국가대표 선수들은 입술만 달싹인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아예 애국가를 따라하지 않고 기도하는 걸로 대신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 열광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운 넘치는 목소리에 시민된 자세를 가다듬는 경건함과 기백을 담을 순 없는 것일까? 공식부문과 비공식 부문이 좀 다를 수 있다지만, 노래방에서 취흥에 겨우 마구 달리는 태도와는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고대 이래로 음주가무에 능하다고 자랑해온 우리는 왜 이렇게 애국가만은 모기 같은 소리로 부를까?
 

냉정하게 말하자.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애국가가 갖는 대표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아왔다. 그게 진실에 가깝다. 그건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수호해야 할 가치있는 나라로 여기는 애국교육의 실패, 시민교육의 부재가 낳은 기현상의 하나인데, 좌파의 음모 여부를 떠나 모두가 반 대한민국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못된다는 자기 비하가 오래 진행된 결과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우심해진 게 사실이지만, 뿌리는 그에 훨씬 앞선다. 유신 반대 시위가 박정희 정부를 괴롭혔고, 이른바 재야지식인 그룹이 형성됐던 1970년대 벌써 교육과 지식정보의 헤게모니는 좌파에게 빼앗겼다. 문학과 출판 부문에서 시작된 민중주의 물결은 영화 연극 미술 장르로 번졌고 삐딱한 일탈의 상상력을 작가됨의 자세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벌써 국가주의란 타도대상이었고, 원죄로 치부됐다. 건강한 애국주의는 당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1970년대에도 이미 학교 조회 등에서 불려지던 애국가는 모기소리처럼 앵앵대는 수준이었다.

반 대한민국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모두가 원죄?

박정희 시절 이미 반 국가주의 풍토가 무시 못 하는 수준이었고, 애국가는 ‘힘차고 자랑스러운 노래’가 못되었다. 그게 1980년대를 만나 한 번 더 증폭된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짝퉁 주사파의 마인드의 일종인 ‘NL정서’의 형태로 악화된 채 한국인의 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상징의 하나가 운동권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달라는 아주 집요하고 음험한 움직임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꼭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던 것은 애국가 무시(無視)였다.
 

당시 노무현은 탄핵 후폭풍으로 의석을 크게 늘린 2004년 당시 집권여당 젊은 당선자 33명과 함께 한 청와대 공식모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그때 벌써 애국가는 상처를 입었다. 그 일을 전후해 이 땅의 좌파들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를 대표적 친일파로 규정해 친일파 인명사전에 올려놓은 뒤, 상황이 그러하니 애국가도 바꿔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3도 낮춘 애국가’를 놓고 서울시교육청이 변명을 하는 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출간된 명저 <대한민국 역사>(기파랑)의 저자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국민의 대다수가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도 없다.”고 일갈한 것도 되새겨봐야 할 명제다. 공유하는 국가 역사가 없는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다. 그가 인용한 설문조사 결과대로 2011년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이란 단체가 전국 400개 중·고등학생 2,500명을 대상으로 “만약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했더니 결과가 참담하다. 
 

“참전한다.”는 대답은 11.8%에 불과한 296명이었다. 놀랍게도 “해외로 도피한다.”는 대답이 35.7%(892명)나 되었다. 요즘 중고교생들은 그렇다고 개탄하지 말자. 어른들, 특히 국방을 책임진 장성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말 국회 국감장에서 “남북이 일대일로 붙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의원 질의에 한 장성은 “우리가 패배한다.”고 답했던 걸 우리는 기억한다.
 

국제정치학자 이춘근 박사는 자신의 책 <격동하는 동북아, 한국의 책략>에 서 국가란 ‘전쟁하는 조직’이라는 게 정치학의 상식인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도저히 국가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반신불수 애국가만이 개탄스러운 게 아니라 국민의 이름으로 공유하는 현대사가 없으며, 전쟁이 날 경우 차라리 도망치고 말겠다는 병든 집단심리가 경악스러운 것이다.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더 아찔한 노릇은 이런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크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이가 의아해 할 것이다. “우리만큼 애국적인 국민이 어디 있는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렇고, 해외여행 때 외국 거리의 삼성, LG 등 대형 간판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던가?” 상식이지만, 그건 애국심이라기보다 민족감정 내지 본능에 속한다. 애국심은 나라의 기초 이념과 역사에 대한 이해, 동의, 자발적 헌신에 기초해 성립하는 국민적 연대감 혹은 도덕적 책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수준의 애국심이 현저하게 취약한 것이 사실이며, 애국가 논쟁에서 보듯 이미 애국교육의 부재는 중병에 접어들었다.

   
▲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가운데)이 4일 패널로 나와 애국가를 3도 낮춰 부르게 한 조희연의 서울시 교육청은 애국가를 비하하고, 성공한 대한민국를 폄훼하는  전교조와 좌파들의 책략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병든 사회 재촉하는 반신불수의 애국가

한국의 청소년들이 전혀 애국적이지 않고, 교사들은 참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불어넣기 바쁘다는 건 더 이상 이 나라의 비밀이 아니다. 교육정책을 맡은 정부 당국이 국민의 의무를 소중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탓이다.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빼도록 지시했던 사람이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이던 서남수 였는데, 그는 이임사에서도 교육의 중립 의무를 들먹인 걸로 악명이 높다.

좌와 우의 이념 싸움에서 이 땅의 교육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헛소리를 한 사람에게 1년 반 교육부 수장(首長)을 맡겼다. 그의 후임자 황우여 장관도 대한민국 정체성 교육문제에서는 흐릿하기는 매일반이 걱정을 피할 수 없다. 반복하지만 ‘3도 낮춘 애국가’의 문제는 변성기 학생을 위한 배려 타령을 할 수 있는 한가한, 그리고 기술적인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 나라의 안위(安危)를 좌우할 수도 있는 큰 현안이 분명하다. 서남수 못지않게 우려스러운 황우여 장관이 이 사안에 총대를 매고 나설 것 같지 않다. 서울시교육청이 없던 일로 뒤로 물릴 것으로 관측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좌우의 이념대립에서 헌법 가치를 뒤흔드는 세력을 응징하고 사회를 지켜고 국가를 수호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무엇보다 정부에 있다. 문제는 그런 어이없는 인식의 포로가 된 채 대한민국 호(號)를 움직이는 고위공무원, 교육관계자, 군 장성, 정치인들이 수두룩하다. 출구 없는 이런 상황의 실체는 무엇일까? 필자는 얼마 전 지금의 한국사회가 국가이성의 마비단계로 진입했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는데, 그게 성급한 예단이 아니고 정확한 진단이라는 걸 요즘 새삼 절감하다.
 

국가가 국가이기 위하여, 그 틀을 유지· 강화해가는 데 필요한 공리(公理)이자 행동법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가 하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가 갑자기 흔들리는 건 아니다. 국가이성의 마비에 준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 속에서 피할 수 없이 나타나는 각종 병적인 징후가 속출할텐데 그 하나가 ‘3도 낮춘 애국가’의 형대로 등장했다는 예감을 나는 지금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걱정이다.

‣ 기술적 해결책 몇 가지

- 장사익 표 애국가를 포함한 다양한 애국적 애국가를 보급한다.(서울시 교육청의 3도 낮춘 애국가는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각급학교에 강제하는 힘이 걱정스러운데, 우파 진영에서 균형을 잡는 시도로 애국적 애국가 보급운동을 할 수 있다. 5~6명의 대중가수가 참여한 당당하고 힘있는 편곡의 애국가를 CD에 담아 보급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도 머라이어 캐리 등이 부른 다양한 ‘성조기여 영원하라’ 등이 널리 불려지고 있다.)

- 애국가 4절까지 부르기 운동을 벌인다.(국민의례 때 애국가는 생략한다는 식의 편의적 행동 대신 반드시 애국가를 부르도록 하며, 이때 4절까지 부르는 것을 습관화한다.)

- 애국가 4절 외우기, 대한민국 헌법 1조~5조까지 외우기,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3종 한 세트로 해서 평소에 생활화한다.(이걸 각종 입사 시험 등의 면접 때 면접관이 질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 조갑제 대표가 1년 전 사석에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학생시절 안익태 선생에게 직접 들은 말인데, ‘당초 애국가를 작곡할 때 지금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되는 것보다 좀 더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게 작곡가의 의도였다’고 한다. 이걸 염두에 두고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등에서 새로운 레코딩을 할 수도 있다.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