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원로 한명희 교수, 호암의 국악사랑 첫 증언
그는 민속악에서 정가까지 좋아했던 '국악계 큰손'
   
▲ 조우석 언론인
요즘 누가 국악의 멋을 아는가? 우리 문화유산 중 국악 장르야말로 가장 빼어나며 경쟁력이 있다는 걸 열린 귀를 가진 멋쟁이만이 알 뿐인데 삼성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 국악애호가라는 걸 최근 확인했다. 그것도 이른바 귀명창에 속했다.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 예술원 회원 한명희(80)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펴낸 새 책에서 그 점을 알고 기분이 썩 유쾌해졌다. 그가 펴낸 책은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韓樂界)의 별들>, <학 떠난 빈터에는>(이지출판)인데, 두 책은 평생의 인연으로 만났던 명인 명창을 두루 소개하고 있지만 국악인이 아닌 분은 호암과, 방일영 조선일보 전 회장 등 고인(故人) 2~3명뿐이다.

방 회장이야 자격이 충분하다. 국악에 대한 이해가 더 낮았던 1990년대에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한 공헌만 해도 어딘가? 그럼 호암은 한 교수와 어떤 인연일까? 한 교수의 첫 직장이 1960년대 TBC 음악 피디였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이라서 자연스레 국악-클래식 전반을 관장했다.

자연스레 국악 매니아 호암이 그를 알아보곤 바로 인연을 맺었는데, 국악 관련 녹음을 종종 부탁했다. "정남희 산조를 구해보라.", "백남준 거문고 산조 좀…" 그게 쉽지 않은 부탁인 게 못 들어본 이름이 숱했다. 일테면 정남희는 월북했던 명인. 때문에 녹음도 끝내 못 구했다. 백남준은 수소문 끝에 유성기 녹음을 확보해 그걸 복각해 진상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한국화의 대가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을 모셔다가 시조창을 녹음해보자는 깜짝 제안도 호암은 했다. 그의 귀가 보통이 아니었고 산조 등 민속악은 물론 가곡-가사와 함께 정가(正歌)의 하나인 시조창까지 두루 좋아했다는 뜻이다. 물론 호암의 하명만 있었던 게 아니다.

당시 젊었던 한 피디가 알아서 녹음테이프를 구해드린 경우도 있었는데, 판소리꾼 임방울의 녹음이 그랬다. 어느 해 방학, 중고교 음악교사들에게 강습을 한 뒤 "혹시 괜찮은 국악 유성기 음반을 보면 연락 해달라"고 청했다. 직후 전남 강진의 한 교사가 SP판을 보내왔는데, 그 유명한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가 포함된 유성기였다.
 
   
▲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은 뜻밖에 국악 애호가였다. 한명희 교수에 따르면, 그는 타고 다니던 벤츠600안에서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유성기로 녹음한 소리꾼 임방울을 감상하곤 했다. /사진=호암재단 제공

벤츠600 안에서 듣던 임방울 '쑥대머리'
 
정성껏 스테레오로 복각하는데 성공했으나 지글지글 끓는 잡음에 섞인 임방울 목소리는 모기처럼 앵앵댔다. 그런대도 호암은 입이 벌어졌다. 타고 다니던 벤츠600 안에서 그걸 수시로 듣곤 했다. 당시 그걸 복각했던 TBC 기술국 엔지니어는 임경춘으로 훗날 삼성르노차 사장이 됐다.

호암의 성격은 칼칼했다. 한 번은 민속악계의 원로 박헌봉이 갖고 있는 국악곡 하나를 복각해달라라고 당부했다. 한 피디가 서울 정릉의 집을 찾아가 뜻을 전했지만, 뜻밖에 퇴짜를 맞았다. "아, 내가 진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채록해온 건데…"하는 식이었다. 고민 끝에 그대로 말을 전했더니 평소엔 그렇게 부드럽던 호암이 단칼에 결론을 냈다.

"다시 한 번 그 집에 가면 내가 혼낸다." 호암은 바로 미련을 접은 것이었다. 서울 남산에 국악예고를 지어주던 국악계의 큰손이 호암이었지만,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반면 호암은 젊은 한 피디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선뜻 받아주는 탄력성도 있었다.

"명인 명창이 더 늙기 전에 그분들이 부를 수 있는 걸 모두 녹음하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공감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분도 호암이었다. 그 결과 김소희-박녹주-박초월-신쾌동 같은 쟁쟁한 분들 레코딩에 들어갔다. 그럼 호암의 식견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 교수의 평가는 이러하다.

"진실로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던 귀명창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호암 이병철 선생을 앞세울 것이다.…'논어'에서 말하는 지지(知之, 잘 아는 것)와 호지(好之, 좋아함)의 단계를 넘어 낙지(樂之, 즐김)의 경지에 들어 유어예(遊於藝)의 세계를 소요했던 분임에 들림없다."(<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韓樂界)의 별들> 165쪽)

호암의 국악 사랑을 증언은 그 자체만으로 귀중한데, 궁금증은 더 커진다. 그런데 호암은 어떻게 국악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그게 그의 생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호암의 공식 전기인 <호암자전>(중앙일보 1986년)을 다시 훑어본 뒤에야 궁금증을 조금 풀 수 있었다.
 
   
▲ 새책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韓樂界)의 별들>, <학 떠난 빈터에는>을 펴내 평생 인연으로 만났던 명인 명창을 소개한 한명희 교수.

20대 기방(妓房) 출입 때 국악과 인연
 
섬세한 성격의 그가 미술품-만년필에서 골프채-파이프에 이르는 다양한 콜렉션을 했지만, 다른 것과 또 달리 국악사랑은 호암이 문화예술을 접하는 첫 인연이자 첫정이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던 게 1938년인데, 그는 그 직전 경남 마산에서 나이 스물여섯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청년 호암이 2년간 손댔던 게 곡물 거래를 겸한 정미와 운수 사업이었다. 그게 삼성의 전사(前史)인데, 사업이 썩 잘 풀렸다. 정미업은 물론 트럭 20대를 굴린 결과다. 호암 증언대로 당시 자동차 값은 요즘 비행기 값이었다. 자연스레 요정 나들이를 시작했는데, 다음은 그의 고백이다.

"그 무렵 마산에는 천해관 등 한국식 요정이 서너 군데 있었고, 일본식 요정이 다섯 군데 있었는데, 나는 그 모두의 단골이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합해 80~90명 기생들과도 곧 낯이 익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술보다는 주연(酒宴)의 분위기 그 자체를 더 즐기는 편이었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라에 태어난 허탈감이 요즘 출입의 동기가 되었던 것 같은데, 시간당으로 받는 화대로 사는 기생들 가운데 노래를 잘하거나 무용에 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니 끼어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흥청거려 보는 것도 하나의 위안은 되었다. 그 무렵 몸에 젖은 국익 취미 때문에 후일 나는 국악의 발전에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28쪽)

스토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대구 진출 뒤에도 요정 나들이는 계속됐다. 어느 정도였을까? 때론 서울-동래로 진출했고, 일본 교토 등지로 원정도 했다. 호암의 진솔한 표현대로 그렇게 "방일(放逸)하게" 살던 젊은 시절인데, 역설이지만 그런 인연 속에서 국악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훗날 TBC를 개국한 뒤에는 국악 고정 프로그램을 넣게 했고, 삼성문화재단을 스폰서로 내세우게 됐다는 고백이 바로 뒤이어 나온다. 어쨌거나 호암 삶에서 국악이란 그렇게 특별했다.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익힌 뒤 평생 취미로 발전했다. 이후 경영인 호암의 스토리는 우리가 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살던 호암은 해방 직후 정신이 번쩍 났다.

확실히 해방이 분기점이었는데, 26세 때 사업 투신이 제1의 각성이라면, 해방 직후 사업보국의 신념 아래 제2의 각성을 했다(40쪽)는 표현도 그는 하고 있다. 1946년 남로당의 대구 폭동을 겪었고, 당시 대구에 내려왔던 우남 이승만 박사를 젊은 실업인 자격으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그걸 계기로 사업보국이 자신의 기업철학으로 발전했고, 그게 삼성물산공사 설립 등 삼성의 초기 역사 전개로 이어진다. 이병철 회장의 숨겨진 스토리를 일러준 한 교수의 책 두 권은 그래서 소중하다. 당대의 큰 기업인의 국악 사랑이란 그가 문화예술에 관심 갖게 된 첫 인연이었고, 그게 평생을 갔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간다.

더욱이 그 안에 삼성 초창기 역사까지 배어있어 흥미로운데 다음 회는 호암이 그렇게 좋아하고 즐겼던 우리시대 별들인 국악계 명인 명창 얘기 차례인데, 한 교수가 전하는 그 스토리 또한 유익할뿐더러 풍류가 넘친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