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업 김대중정부의 대우그룹 해체, 박정희 패러다임도 동반붕괴시켜, 한국 성장 동력 상실

15년 만에 진실을 요구하는 '김우중 회고록' 새로 읽기 <상> 

많은 말이 나왔지만, 필요한 성찰은 드물었다.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펴낸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북스코프 펴냄) 출간 직후 상황이 그렇다. 17년 전 IMF 외환위기와 뒤이은 대우그룹 해체는 경제사·기업사에 가장 결정적 사건인데 논의를 더 확장할 수 없을까? 김우중 회장의 진면목을 새로 보고, 그의 증언을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에 신음하는 한국경제의 실상을 바로 보는 계기로 삼을 순 없을까? 문화평론가 조우석이 이런 각도에서 김우중 회고록을 새롭게 읽었다. 책 읽은 소감을 상, 하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이번이 하 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추징금 18조(兆)원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지난 달 말 공식 석상에 등장해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된 소회를 15년 만에 밝힌 뒤 퇴장하는 김우중 전 회장에게 우르르 몰려간 취재진이 그렇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건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일방적 폭언 내지 비아냥에 가까웠다. 취재기자들의 거친 태도에는 국민 다수가 품고 있는 반(反)기업정서가 공격적인 형태로 반영되어있다.
 

대형 포털 기사에 달려있는 댓글도 험악했다.“(대우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납 추징금부터 토해내라.”“당신 때문에 투입된 혈세가 수십 조 원이야.” 대우는 아직도 뜨거운 얘기다. 부실한 재벌은 한국경제에 공공의 적이고, 구조조정은 필수였다는 17년 전 환란(換亂) 당시 김대중 정부가 유포시켰던 고정관념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그런 짧은 인식이 IMF 이후 20년 가깝게 저성장에 시달리면서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필자는 경제에 문외한이지만, 동시에 고정관념에서 자유롭다. 5년 전 단행본 <박정희, 한국의 탄생>(살림출판사)을 펴내며 개발연대의 정치 경제를 한 차례 점검해본 경험이 전부다. 그런 필자의 눈에 인상적이었던 건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주인공인‘사람 김우중’이다. 털어놓은 발언의 행간에서 그의 소신과 격정 그리고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배순훈의 증언“정신이 확 들도록 눈에서 불을 뿜던 김우중 회장”

“이 책은 많은 구체적 사실들은 생략한 채 분노와 주장과 때늦은 반발을 쏟아내고 있다”는 지적(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실장)도 있지만, 그건 과도한 지적이다. <김우중과의 대화>는 이 경제 거인의 육성을 듣기에 괜찮은 기회였고, 개발연대의 빛과 그늘을 성찰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너무 믿었으니 끝내 대우의 뒤통수를 때렸던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모자란 건 우리가 채워 읽으면 된다.
 

기업은 결국 창업주의 스타일과 비전의 확장이 아니던가?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해 1998년 해체 직전 매출 71조 원의 국내 재계순위 2위였던 대우 사령탑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보는 이의 정신이 확 들도록 눈에서 불을 뿜던” 사람(<우리에겐 위기극복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50쪽)이었다는 게 MIT 출신 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의 회고다.
 

   
▲ 김우중회장은 도전 헌신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국가와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며, 대한민국의 글로벌경영, 세계경영을 선도했다. 외환위기이후 반기업적인 김대중정부에 의해 대우는 해체됐다. 사업보국, 국가를 위한 희생에 자신을 모두 바쳤던 김우중정신은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김우중정신은 아직도 살아있다. 현재형이다. 김회장이 최근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참석해 눈물을 글썽이며 대우해체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기계를 인수한 직후였던 나이 만 40세의 김 회장은 배순훈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가진 자들은 국가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오래 전 몸에 밴 경영철학이었음을 훗날 재확인했다. 동시에 그는 무주(無酒), 무유(無遊), 무색(無色) 의 3무(無) 인간이다.
 

술 마실 줄 모르고, 놀지도 못하며, 여자 스캔들 역시 없다는 게 <김우중과의 대화>의 저자인 신장섭 교수의 말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나인 투 파이브(아침 9시에서 오후5시까지 근무)로 일한다면, 한국인은 파이브 투 나인으로 일해야 한다고 김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국가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자였다. 그런 창업주 김우중의 지휘 아래 대우의 신화가 이 땅에 펼쳐졌다.
 

대우실업 창업 5년만인 1972년에 수출 2위 기업이 됐고, 그 2년 뒤인 1974년에는 한국 최초의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았다. 하나하나 말뚝 박아가며 성장했다는 현대, 삼성과 또 달리 성큼성큼 뛰었다. 현대와 삼성이 기술자 창업주의 손으로 컸다면, 대우는 화이트칼러 출신의 김우중이 주로 인수합병(M&A)방식으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국가에 대한 헌신밖에 몰랐던 일벌레이자, 재계의 금욕주의자

김우중은 재계의 대선배 정주영, 이병철 두 분과 나이가 20살 내외로 벌어졌지만, 전경련 회장에 오르기 전에는 재계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너무 빠르게 성장했고, 박정희 대통령과 배석자 없이 독대하기를 밥 먹듯 한다는 소문까지 겹쳐졌으니 질시와 오해가 커졌고,“김우중은 사기꾼”이라는 헛소리도 퍼졌다.
 

본인 스스로는 해방 후 한글로 교육 받고 대학교육까지 받은 첫 기업인 세대라는 자부심이 컸다. 다만 정주영 회장, 이병철 회장 등 한국기업사의 큰 이름과 공유했던 가치는 명백했다. 국가발전에 대한 기여가 그것이다. 김우중은‘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을 기업의 목표로 삼았다. 대우의 사훈(社訓)이 ‘창조 도전 희생’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대우의 칼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삼성이 전자와 금융에 강했지만 중화학산업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해외건설 시장도 늦게 진출했다. 현대는 중화학산업과 해외건설에서 강점이 있었지만 경공업수출에는 내놓을 만한 게 없었다. 대우는 한국경제 개발의 3박자인 경공업 수출, 중화학 산업, 해외건설을 묶어 성장했다.
 

실제로 봉제품 수출로 일어선 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인수 이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옥포조선(대우조선)을 차례로 인수했는데, 그 과정은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도약과 완전 일치한다. 흥미로운 건 그는 본래 금융업 쪽으로 뻗어나갈 꿈을 가졌지만,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권유와 회유로 방향을 바꿨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수의계약에 따른 중화학공업 인수는 지금 시각으로 보아 특혜가 명백하고, 이 과정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고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경유착에 대한 의혹을 김우중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해명하는데, 나는 그게 액면 그대로의 진실이라고 믿는 쪽이다.
 

“정부에서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거지요. 그리고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잘해야 돼요. 그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장사꾼이 돈만 바라보고 일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66쪽)
 

그게 개발연대의 시대정신이자, 국가적 합의였다. 그 시대를 이끌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과 창업주 사이의 그런 교감을 지금 우리는 정경유착의 스캔들로 규정해 훼손하기에 바쁘다. 이런 고정관념은 IMF 개혁 프로그램의 칼을 들었던 경제관료에게는 집착에 가까웠고, 그건 대통령 김대중이 더했다. 그의 대중경제론은 노골적인 평등주의 성향으로 색칠됐다. 그래서 저들은 “재벌과 대기업을 손보자”며 인적 청산도 불사했다.

"재벌과 대기업 손보자"며 칼질에 나섰던 김대중의 경제관료

그러나 저들이 못 보는 건 개발연대 창업주들이 기업과 국가 사이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국가발전이 먼저였다는 점이다. 인터뷰어인 신장섭 교수가 밝힌대로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큰 야심을 가진 김우중 회장에게 야심의 종착역은 매출 극대화과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국가였다. 그런 상식이 훗날 정경유착에 관치금융에 중복투자로 매도 당하고 난타당하는 게 한국사회의 불행이 아닐까?
 

실제로 사업보국은 대우는 물론 현대와 삼성까지 공유했던 큰그림이다. 박정희가 항용했던 표현대로 “생긴 것은 막걸리이지만 일하는 건 위스키” 였던 현대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는 서로가 핵심 파트너로 소중했다. 개발연대의 최전선의 두 리더는 자기 꿈을 위해 호흡을 맞췄다. 기질적으로 가까운 게 정주영-박정희라면, 이병철-박정희는 또 달랐다.
 

서민 기질을 공유하진 못했지만, 대국을 보는 시선이 다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많다. 1961년 쿠데타 초기 박정희가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혁명공약 넷)고 선언했을 때 벌써 이병철은 재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정축재자 기업인 제1호였던 이병철은 자기의 경제 비전을 당당하게 피력해 혁명 정부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우리는 영국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서 경제발전의 고전적 코스를 밟아 내려올 시간이 없다. 과감하게 순서를 바꾸어 공업화를 먼저하고 대기업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농촌을 구제하는 것은 과감한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를 통해 가능하다.”
 

당시 이병철이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은 훗날 박정희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이병철 회장이 자서전 <호암자전>에 수록한대로 1974년 석유화학, 중공업에 진출하고, 조금 뒤인 1982년 반도체에 뛰어든 먼 배경엔 산업지휘관 박정희의 역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김우중은 또 달랐다. 그는 박정희의 아바타라고 봐야 한다. 이번 인터뷰집에서 김 회장은 수없는 독대의 자리에서 박정희는“김 회장”이라는 공식호칭 대신 “우중아!”라고 했다는데, 둘 사이는 그만큼 교감하는 게 많았다. 대구사범 스승(김용하)의 아들이 김우중이라는 요인은 차라리 두 번째가 아니었을까? 무서운 추진력과 경영능력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이 둘 사이를 묶어준 결정적 요인이라고 나는 믿는다.

좌승희 박사 "IMF와 대우그룹 해체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

회고록 출판기념회 연설에서 김우중 회장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것이 국가와 미래 세대에 반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건 자기 위안만은 아니다. 삼성 현대 LG SK의 창업주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김우중은 거의 유일한 생존자인데, 재계 원로인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
 

“(리비아 모래폭풍을 뚫고) 비행기 타고 갈 때 기류 때문에 흔들리는 적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추락할까 봐 두려워하는데, 나는 어디 한 번 떨어져봐라. 내가 죽나 어떤가 보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345쪽)
그러던 김우중이 실제로 추락했다. 그게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진 대우그룹 해체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국제사기꾼으로 매도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런 인식을 씻기 위해서라도 다음 회 필자는 IMF와 대우그룹 해체문제를 한 번 더 다룰 생각이다. 미리 밝히지만 경제에 무지한 필자가 의지하는 건 학자 좌승희 박사의 도움말과 책이다.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IMF와 대우그룹 해체는 김대중 대통령의 신흥경제관료와 김우중 회장 사이의 경제철학이 부딪치고 감정 충돌하는 과정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경제를 추동해오던 박정희 경제의 패러다임이 깨지는 결정적 사건이예요. 그렇게 봐야 한국경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
 

나는 그 시각에 충실한 채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새로 읽어볼 생각이다. 외환위기와 대우 해체를 돌발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지속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그 결과 파생된 한국경제의 성장동력 상실을 함께 다룬다. 그렇게 하는 게 대우그룹의 성장과 해체에 관한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접근하는 길이 아닐까?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