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족적 다르다는 이유로 3차례 기회 놓쳐 장기미제 수렁으로
당시 혈액형 왜 틀렸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미디어펜=온라인뉴스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가 화성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강간미수 등 믿기 어려운 횟수의 강력범죄를 저질렀다고 지난 2일 자백했다.

이 씨의 말대로라면 그는 군에서 제대한 1986년 1월부터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해 검거된 1994년 1월까지 8년 간 40여건에 이르는 강력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 같이 꼬리가 길었음에도 이 씨는 화성사건의 7차 사건과 9차 사건 사이(8차 사건은 모방범죄)인 1989년 9월 26일 벌인 강도미수 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200일 동안 구금됐던 사실을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검거되지 않았다.

이 씨가 번번이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경우 족적과 혈액형이 꼽힌다. 이 씨는 6차 사건 이후 주민 제보 등을 토대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찰 지휘부에 보고까지 된 바 있다.

그러나 6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족적과 이 씨의 것이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은 비가 6차 사건 때 많이 온 점에 착안해 현장에서 확보한 245㎜의 족적이 실제보다 축소됐을 것으로 예상하고 255㎜로 범인의 족적을 계산한 뒤 수사에 활용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방식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 씨는 이후에도 화성사건으로 인해 2차례 더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풀려나기에 이른다.

이때는 9, 10차 사건이 벌어진 때다. 당시 경찰은 이들 사건의 증거물에서 확보한 범인의 체액을 분석해 범인의 혈액형을 B형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 씨는 혈액형이 O형이었기 때문에 또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혈액형 분석이 왜 틀렸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경찰 당국은 세번의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 씨가 자백한 화성사건 외 5건의 살인사건에 대해선 경찰이 자백의 신빙성을 검증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꺼리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경찰 수사를 피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5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1건으로 추정되는 수원 여고생 살해사건을 보면 당시 경찰의 부실 수사가 이 씨의 범행이 30여년 동안 드러나지 않은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사건은 1987년 12월 24일 여고생이 어머니와 다투고 외출한 뒤 실종됐다가 10일 가량 지나 1988년 1월 4일 수원에서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선 범인이 피해자를 결박하는 데에 속옷을 사용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화성사건의 '시그니처(범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씨가 자백한 살인사건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 사건은 화성사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발생했다. 6차 사건과 7차 사건 사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수원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화성사건과 연관 짓지 않았다. 이 씨가 아닌 다른 용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마구 폭행해 이 용의자를 숨지게 하면서 수사가 흐지부지됐다. 여기에 이 씨의 치밀한 범행 수법까지 더해져 이 씨는 15번째 살인 피해자가 발생하고서야 단지 이 피해자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수사기관에 체포됐다.

마지막 피해자인 이 피해자는 이 씨의 처제로 그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 자신의 집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수차례 때려 살해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이 씨는 범행을 저지르고 밤을 새워 증거물을 치웠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장 감식 과정에서 가까스로 화장실 문고리와 세탁기 밑 장판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씨의 혐의를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이 씨를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당시 이 씨가 어떻게 경찰의 수사망을 따돌렸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아직 그 부분에 대해 진술을 받거나 확인한 내용은 없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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