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녕릉(英寧陵)과 명성황후 생가 이어 걷기
   
▲ 효종대왕 영릉 [사진=미디어펜]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조선 왕릉(朝鮮 王陵)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다.

조선 왕조의 무덤은 총 119기인데 그중 임금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은 42기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묻혀 있는 곳은 원()이라 하고, 13기가 있으며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 등이 묻힌 장소는 묘(), 모두 64기가 있다.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에서 으로 격하되면서, 무덤도 묘가 됐다.

42기의 왕릉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있으며, 이중 40기가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개성에 있는 2기는 북쪽에 있어 함께 등록되지 못했다.

왕릉은 형태상 크게 6가지가 있다.

단릉은 봉분이 하나로, 왕이나 왕비 1명만 묻혀 있다. ‘쌍릉은 봉분 2개로, 각각 왕과 왕비가 나란히 묻혔고, ‘삼연릉은 왕 1명과 왕비 2명의 능이 나란히 있다.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가 하나의 봉분에 함께 안장된 것이다.

단릉과 합장릉은 같이 봉분이 하나지만, 무덤 앞 상석이 1개냐 2개냐에 따라 쉽게 구분된다.

동원이강릉은 같은 산 안 비교적 넓은 면적 2개의 능선에 따로 능을 쓴 것이고, ‘동원상하릉은 장소가 좁아 같은 능선에 왕은 위에, 왕비는 아래에 각각 모신 것이다.

조선 왕릉은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도성 외곽에 위치해 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왕릉은 서울성곽의 4대문 10리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또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강원도 영월의 장릉과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여주의 영녕릉(英寧陵)80리 밖에 있다.

제릉은 태조 이성계의 첫 왕비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이고, 후릉은 2대 정종과 정안왕후가 묻혔는데, 이들은 모두 개성에서 숨졌고 현지에 묘를 썼다. 장릉도 폐위된 단종이 영월에서 살해됐기 때문에 그 곳에 능이 조성됐다.

반면 영녕릉은 처음 다른 곳에 있다가, 풍수지리 등의 요인으로 이장된 곳이다.

영녕릉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및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세종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동릉이실)으로, 처음 소헌왕후 사후 서울 내곡동에 있는 태종의 헌릉 옆에 능을 썼다가, 세종이 사망하자 최초의 합장릉이 됐고,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뤘다. 그러나 풍수상 터가 안 좋다고 해서, 예종 때인 1469년 여주로 옮겼다.

효종의 영릉은 원래 구리시의 태조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는데,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든다는 이유로 여주로 이장했고, 인선왕후가 죽자 기존의 능 밑에 별도의 봉분을 만들었다. 즉 조선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었다.

필자는 109한글날을 맞아, 여주의 영녕릉과 명성황후 생가를 이어 걸어보기로 했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후원하는 경기그랜드투어프로그램을 통해서다.

경기그랜드투어는 전세버스로 서울에서 한 번에 가지만, 수도권전철 경강선 여주역을 이용, 걸어가도 된다.

여주역 1번 출구에서 좌회전, 도로를 따라가면 두 번째 교차로 오른쪽에 여주향교가 있는데, 직진해서 계속 가다가 여주소방서 사거리에서 우회전한다.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세종도서관과 세종국악당이 있는 사거리를 통과해 계속 따라가면, 세종대왕릉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우측 길을 따라 세종생활체육공원과 세종산림욕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영녕릉 매표소 입구가 나온다.

그런데 아뿔싸, 세종대왕 영릉은 내부 공사로 2020년까지 폐쇄됐다. 한글날에 세종대왕을 못 뵙다니...효종대왕 영릉과 세종대왕역사문화관만 볼 수 있다. 영녕릉을 잇는 700m ‘왕의 숲길도 같이 폐쇄됐고, 능 입구끼리만 연결하는 영릉길 1000m는 걸어볼 수 있다.

그래도 안내하는 역사전문가는 개인적으로 세종 영릉보다 효종 영릉이 더 낫다고 말해준다.

반신반의했지만, 효종 영릉 재실(齋室)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 곳은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200711월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됐다. 평소엔 능 관리자인 능참봉이 기거하고, 제사 때는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안마당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이 있는데, 회양목으로 이렇게 크게 자란 나무는 아주 드물다. 향나무 및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왕의 숲길 폐쇄 지점에 세종 영릉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들에 아쉬움을 달래본다.

홍살문을 지나자, 본격적인 능역이다. 홍살문 오른쪽에 왕과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 있고, 정자각까지 참도(參道)가 뻗어있다. 참도 중 높은 쪽은 향을 받든 제관이, 낮은 쪽은 왕이 걷는 길이다. 정자각에서도 바로 오르는 계단이 없고, 옆으로 돌아가도록 돼 있다.

정자각은 정()자 모양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안에는 제사음식물을 차리는 상이 있고, 열린 문 위로 능이 올려다 보인다.

능 왼쪽 오솔길로 왕비릉 위쪽 왕릉 바로 앞까지 오를 수 있다. 이것도 왕릉 중 흔치 않다.

능은 담장과 호석을 두르고, 봉분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사가에서는 봉분 앞 상석에 제물을 차리지만, 왕릉에서는 아래 정자각에서 제사를 행하므로, 혼유석은 말 그대로 왕과 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게 통설인데, 최근에는 상석과 비슷한 의미라는 이설도 나왔다.

혼유석 앞 양쪽에 망주석을 세우고, 그 앞엔 석등이 있다.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 돌로 만든 호랑이와 양 등 석물들이 잠든 왕을 지킨다.

능에서 내려와 세종대왕역사문화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릉길로 바로 갈 수 있다.

문화관 입구에선 한글 자음 ‘0’ ‘’ ‘자 모양의 진흙과 기와로 만든 조형물이 반겨준다. 건물 안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취지를 알리는 돌 판이 걸려있고, 곧 세종의 어진이 인자한 미소로 맞는다.

문화관은 세종관과 효종관이 따로 있다. 특별전시실에선 효종의 문예적 소양을 보여주는 글과 글씨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영녕릉을 나와 다시 여주역으로 돌아왔다.

   
▲ 명성황후 생가 [사진=미디어펜]

영녕릉 반대쪽으로 길을 따라가다 사거리서 좌회전, 세종중학교 앞을 지나 아로마식물원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작은 교차로들을 무시하고 계속 직진해 농협을 지나고, GS톨게이트주유소 사거리에서 좌회전, 도로를 조금 따라가면,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입구가 나온다.

고종의 비 명성황후 민씨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극단적으로 대립한 악녀’, 사리사욕과 민씨 일족의 부귀영화에만 골몰해 나라를 망친 여자 등의 부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영특하고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뛰어난 외교술로 나라를 지키려다 일제에 잔인하게 시해당한, ‘순국 여걸이라는 평이 갈린다.

필자는 전자에 가깝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원인이 민씨 정권에 있는 게 분명한 이상, 그 책임을 물어 민비(閔妃)도 대원군처럼 정치에 절대 간여 못하게 하고, 과감한 개혁과 개화를 추진하는 것이 조선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걸 못하고 동학혁명을 맞는 순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

명성황후 생가 일대는 기념관과 생가, 민속마을, 그리고 감고당(感古堂)으로 구분된다.

기념관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영정, 그녀의 생애와 유물들, 그리고 관련된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가득하다. 시해 당시 실제 사용된 일본도가 여러 가지 상념에 들게 한다.

생가는 그녀가 출생해 8살까지 살던 집이다. 높다란 솟을 대문과 행랑채, 사랑채, 그녀의 영정이 있는 안채, 그 뒤에는 어릴 때 그녀가 지내던 초당이 있다.

민속마을은 각종 기념품과 먹을 거리, 마실 거리, 옷과 옷감 등을 파는 초가 가게들이다.

그 너머 감고당은 왕비 2명을 배출한 유서 깊은 집이다. 본래 조선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잠시 폐위됐을 때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됐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됐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