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청춘남녀 가슴 설레게 한 목가적 사랑의 로망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30) - 순진무구한 청춘의 러브 스토리 롱고스(BC 2세기 말BC 3세기 초)다프니스와 클로에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도대체 ‘사랑’이 뭔데요? 소년이에요, 새에요? 그가 뭘 할 수 있나요?”“자, 얘들아. ‘사랑’은 신이란다. 젊고 아름답고 날개도 있지. 그래서 자신은 젊은이들을 좋아하고 미인을 좆아 다니며 영혼에 날개를 달아 주지. 제우스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단다. 흙과 물과 바람과 불에 힘을 미칠 수 있고, 별들이나 다른 신들에게도 힘을 발휘하지. 너희가 염소나 양들에 발휘할 수 있는 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말이다. 꽃들은 모두 사랑의 신의 작품이고, 이 나무들도 그분이 만들어 낸 거란다.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도 그분 때문이지. 사랑에 빠진 소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치 쇠파리에 쏘인 것처럼 큰소리로 울부짖더구나. 암염소를 사랑해서 어디를 가든 그 염소만 뒤쫓아 다니는 숫염소도 본 적이 있지.…사랑에는 약이 없단다. 어떤 음식도 어떤 음료도, 어떤 마술 주문도 약이 될 수 없지. 키스하고 포옹하며 벌거벗은 채로 함께 눕는 것만이 유일한 약이지.”

사랑에 빠져있지만, 자신들이 앓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궁금해 하는 목동 다프니스와 클로에에게 나이 지긋한 목동 필레타스가 들려주는 ‘사랑학 강의’의 한 대목이다.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 중 최초의 연애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리스 고전 문학의 대표적 장르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서사시와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아가멤논>과 같은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신과 영웅들의 희로애락이 주제를 이룬다. 기원전 8세기에서 4세기경까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전성기에 대중의 인기를 끌며 그리스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에서 고대 그리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엿보기는 힘들다.

이전의 이런 작품들과 괘를 달리하는 파격적인 장르는 훨씬 뒤에 나타났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활동한 그리스 레스보스섬 출신의 롱고스(Longos)는 <다프니스와 클로에(Poimenika ta kata Daphnin kai Chloen)>라는 인류 최초의 로맨스 소설을 창작해 낸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대자연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청춘의 러브 스토리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러브 스토리처럼 영웅들의 웅대한 모험과 사랑, 음모와 배신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아니다.

운명적 사랑인 점은 같지만, 이전의 사랑이야기들처럼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성장한 성인들의 계산된 사랑의 욕망과 배신이 넘실대지 않는다. ‘사랑’ 그 자체의 감성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소년 소녀의 가슴앓이를 통해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을 깨달아가며 자신의 감성 표현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이성의 육체에 대한 신비한 마력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사랑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정념들을 겪어가는 사랑앓이의 묘사이기도 하다.

롱고스의 섬세한 언어가 만들어 내는 사랑의 정경을 ‘색채의 마술사’ 샤갈이 감각적인 석판화로 황홀하게 재현하고 있어, 독자의 감성을 한껏 자극하며 이 작품 속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이 책은 41장의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이 담긴 아름다운 시화집이기도 하다.

소설의 테마는 간단하다. 유복한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각각 이웃 간인 양부모에게 길러지면서 염소치기와 양치기로 성장한다. 어려서부터 함께 전원을 누비는 목동 생활 속에서 자라며 서로 사랑에 빠지고, 여러 번의 고난을 겪은 후에 친부모도 찾고 행복한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의 러브 스토리다.

   
▲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e), 장 밥티스트 카르포(Jean-Baptiste Carpeaux)1873년경, 발랑시엔 미술관

‘사랑’이라는 용어를 알기 이전에 떨리고 설레며, 때로 슬프고, 초조한 ‘사랑’의 감성들을 먼저 느끼며,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어쩔 줄 모르는 순진무구한 청춘들의 ‘사랑연습’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상대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신비한 호기심을 키우고, 마음에 이는 미묘한 감성들에 반응하고 고민하며 사랑을 확인받고 싶고 영원한 약속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랑의 생래적 정념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염소와 양을 방목하는 전원이 사랑의 무대다. 염소치기와 양치기로 자랐지만, 원래 귀한 신분에서 태어난 다프니스와 클레에는 아름다운 풍모를 갖췄고, 팬파이프의 연주로 염소와 양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의 음악적 재능과 목동의 역량도 가졌다. 대자연 속에서 목동으로서의 어우러진 생활은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준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부끄러움 없이 키스와 포옹으로 표현하고, 알몸으로 함께 누워 행복한 시간을 보내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인지 채울 수 없는 허전함, 그것을 채워 줄 그 이상의 사랑의 표현법을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사랑의 교사가 나타난다. 노인 필로타스에게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치고, 다프니스는 유부녀 리카이니온의 유혹에 이끌려 은밀한 육체의 사랑법을 배운다. 다프니스는 엉뚱한 기회로 순결을 잃지만 오로지 클로에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에 기뻐하며 리카이니온에 감사할 정도로 순진하다.


   
▲ 루이즈 마리 잔 에르장(Louise Marie Jeanne Hersent, 1777~1860), 18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다프니스가 해적에게 납치되기도 하고, 클로에가 전쟁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는 환난을 겪고, 두 사람의 결혼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방해로 곤경을 처하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에 성공한다. 림프와 디오니소스, 목신(牧神) 판의 가호와 개입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 첫 날 밤 비로소 그들은 “그들이 나무 아래서 했던 온갖 일들은 모두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한국의 근대 단편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대담한 표현과 전개 방식이 고대기에 나왔다는 게 이채롭다. 시골의 전원에서 순진무구하게 자란 청춘이 사랑의 표현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장면들은 에로틱하면서도 환상적 요소가 많다.

특히 롱고스는 청춘 남녀의 사랑의 열망을 남녀 간의 끌림과 교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서 나온 것으로 고귀하고 순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로의 육체에 대한 호기심과 갈구를 한 뼘 한 뼘 가슴 떨리게 진전해 나가는 방식은 속성 사랑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보기엔 참기 어렵게 감질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러브 스토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 고난을 이겨내고 사랑의 설렘과 떨림, 환희의 감성을 나누고 체득해 나가는 사랑의 교과서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대문호 괴테가 “이 책이 인류의 가장 숭고한 예술과 문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극찬한 이유도 이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 감성인 사랑의 원형을 가장 내밀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러브스토리가 수많은 미술작품과 발레 음악을 탄생시킨 영감을 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결혼 풍습을 엿볼 수 있는 건 덤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 『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지음, 마르크 샤갈 그림, 김원중․최문희 옮김, 세미콜론(208). 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