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찌질한' 남편들이 나오는 영화를 며칠 새 세 편이나 봤다. 술만 마시면 아내를 마구 패거나 쥐 잡듯 몰아대서 그이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남편들이 아니다. '사랑'을 앞세운 묘한 언설로 아내들의 영혼과 재능을 착취해 부와 명예를 누리는 남편들이 나오는 영화다. 모두 이리저리 TV채널을 바꾸다가 우연히 보게 됐는데 보고 나니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소설가와 아내(이름도 거룩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다)가 주인공이다. 그 소설가의 작품은 모두 아내가 쓴 것이다. 남편은 작품 활동도 하는 영문학 교수, 아내는 그의 제자였다. 

남편보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아내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보려 했지만 "여성 작가가 쓴 책은 출판조차 어려운 현실"을 알게 된다. 이후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는 척 하는 동안 아내가 책을 써 남편 이름으로 책을 낸다. 

책은 문학적으로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만 여주인공은 세계적으로 탁월한 작가가 된 남편을 성실히 내조하는 아내로만 알려진다. 책 팔아 돈도 생기고 이름도 알려진 남편 주변에는 여자들이 모인다. 남편은 간도 부어서 엄청나게 바람을 피운다. 아내는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이건 내 삶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남편을 떠난다.  

   
▲ '더 와이프' 스틸컷.

<빅 아이즈>의 주인공은 '눈이 큰'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다. 길거리에서 그림을 팔다가 남편을 만난다. 그는 세일즈맨이다. 물건을 파는데 엄청 끈덕지고 질기다. 화가는 남편이 여기저기 그림을 팔아 벌어온 돈으로 하와이의 고급 주택에서 그림만 그리며 난생 처음 먹고 자고 입는 걱정 없는 풍족한 삶을 누린다. 

그러다가 남편이 자기가 화가인 양 하면서 그림을 팔고 있는 걸 알게 돼 "사실 그 그림은 내가 그린 겁니다"라고 주장하며 바로잡기에 나선다. 둘의 진위 다툼은 판사가 법정에서 '눈이 큰' 인물화를 그려보라고 지시하면서 결판이 난다. 

끝까지 자기가 '눈이 큰' 인물화 작가라고 주장하던 남편이 스케치북에 어린 아이가 그린 듯 선 몇 줄만 긋다가 말고 좌절하는 장면은 정말 '찌질함'의 극치였다. 이 영화는 기괴한 영화를 이상하게 잘 만드는 팀 버튼이 감독했다.  

<콜레트>도 사실 기반 영화라고 한다. 프랑스가 배경인데, 재능 있는 작가인 콜레트의 남편은 소설도 쓰면서 전도유망한 작가를 발굴해 책을 내주는 출판 기획사도 운영한다. 그는 아내 콜레트가 누구보다 전도가 밝은 글 솜씨가 있는 걸 알고 글을 쓰게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모두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낸다. 

물론 "여성 작가의 책은 잘 안 팔리는 거 알지?"가 그 이유다. 이 자도 그렇게 번 돈으로 이 여자 저 여자 바꿔가며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난다. 자신이 착취당해온 사실에 분노가 치민 콜레트가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증거인멸에 나서 콜레트의 육필 원고를 불에 태우려 한다. 하지만 비서가 원고를 남기는 바람에 그의 '찌질한' 행각은 세상에 알려지고, 콜레트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고 작가로서 우뚝 서게 된다. 

"아내가 가구소득에서 40% 이상을 벌면 남편들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는 미국 무슨 대학의 조사보고서가 얼마 전에 보도됐는데, 내가 본 영화 속 남편들은 아내에게 100% 이상을 벌게끔 해놓고도 스트레스는커녕 그걸로 남들 앞에서 폼도 잡고 '인생을 즐기며' 심지어는 (영화 속이지만) 노벨문학상까지도 받는 경쟁력을 보였다. 출중하고 절륜하다.  

내가 이 글 쓰는 이유는 그들이 부러워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며칠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 여자 연예인도 따지고 보면 이런 '찌질한' 남자들이 보기 싫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몇 달 앞서 세상을 떠난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고. 

악플 다는 남자만 '찌질하다'고 하지 말자. 그 이유로 "여자는 약자다"라고만 말하면 나를 혼쭐내야겠다고 하실 분 많겠지만, "여자는 아직은 약자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이라고 말하면 좀 덜 할 것이다.  

참, 연예 기사에 댓글을 달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에 어느 분은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는데,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기 전이라도 했으면 싶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하지만 '욕설의 자유'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