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한국 후대세대에 못 물려줘서 미안하고 부끄럽다"…영원한 기업인
'세계 경영'의 개척자이자 한국 경제개발의 산증인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영면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숱한 일화와 함께 비운의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83세로 마감했다. 공과가 엇갈리지만 세계와 미래를 향한 그의 도전과 열정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울림이 작지 않다.

기업가의 정신이 실종된 현실이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애틋하다. 못다 이룬 그의 꿈은 후세의 몫이자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풍운아로 일컬어지지만 생전 그가 꿈꾸었던 가치와 철학은 아쉬움 그 자체다. 오늘날 위정자,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화두가 만만치 않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쳤던 그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가 놀란 경제계 거목이었다. 그의 삶은 도전 그 자체다.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다. 기적을 쓴 대한민국 경제의 마침표 같은 존재다. 그는 무역을 국경 없는 전쟁으로 봤다. 수출을 영토확장이라고 생각했다. 세계경영은 그런 철학이 낳은 전략전술이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그는 반세기전에 걸었다. 반도의 한쪽 끝에 자리하고 있던 우리 민족을 세계로 이끌었다. 오늘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구축의 밀알이었다. 그의 발자취는 중국, 동구권,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곳곳의 대우공장, 건설현장, 호텔 등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 '세계 경영'의 개척자이자 한국 경제개발의 산증인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영면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숱한 일화와 함께 비운의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83세로 마감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힐튼호텔서 언론인들과 간담회를 갖은 김우중 전 회장은 대우그룹 워크아웃의 문제점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사진=미디어펜

샐러리맨 신화의 원조다. 31세 때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뒤 국내 2위 그룹으로 일궜다. 창업 15년만에 재계 4위의 그룹으로 우뚝 섰다. 30년만에 400여개의 해외 현지법인과 600여 곳의 해외네트워크를 갖췄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화로 부르는 이유다.

23년 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그 울림은 아직도 유효하다. 맨주먹으로 일궈낸 그들의 기적에 세계를 깜짝 놀랐다. 그들 하나하나는 기업에 몸담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세계 경제전쟁의 전선에 선 전사들이었다. 그래서 대우 신화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넥슨의 김정주 회장은 김우중 전 회장의 이 같은 세계경영론 덕분에 사업을 키워나갔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인생은 도전과 개척의 드라마다. 기업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그였기에 갑작스럽게 닥친 시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 전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당시 경기중과 경기고를 거쳐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했다. 1963년 싱가포르에서 발품을 팔며  37만 달러어치의 생산 계약을 따냈다. 한성실업이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물량이었다.

1967년 그의 나이 31때 자본금 500만원으로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세웠다. 창업 첫 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다. 이후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혔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정주영, 이병철 등 1세대 기업인들이 제조업이나 건설업을 중심으로 기업을 키울 때 그는 세계 시장을 무대로 무역에 나서 성장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1973년 영진토건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78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넘겨받아 대우조선공업을 출범시켰다. 1979년에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다. 대우전자는 19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만들어진 계열사였다. 19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의 인수와 함께 금성(현 LG)·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1982년엔 대우실업과 합쳐 ㈜대우를 출범시킨다. 무역업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M&A)를 통해 기업을 세운지 20년도 안되어 삼성, 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집단으로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후반 동구권이 무너지는 것을 계기로 '세계경영'을 주창하면서 공격적인 해외 진출 전략을 폈다.

김우중 전 회장은 해외 진출, 과감한 투자, 적극적인 목표 설정으로 고도성장기 경제성장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갖고 있었다. 임직원 수는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에 달했다. 자산 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이었다. 그야말로 '대우 제국'이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그의 왕국을 몰락시켰다. 1997년 대우의 차입금은 1997년말 29조원에서 1998년말 44조원으로 늘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고금리 상황에서 차입금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1998년에 대우가 내는 이자비용은 6조원에 달했다. 여기에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1999년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그리고 대우의 모든 계열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당시 김 회장과 대우맨들은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 "대우의 잘못보다는 당시 정책에 실패한 정부의 잘못이 더 크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전직 대우그룹 임직원들 500여명이 참석한 '대우특별포럼'에서 대우그룹 해체가 사실과 달리 알려져 있다며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고 역사가 자신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길 바란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해체의 원인은 '경영실패'가 아니라 김대중 정권에 의해 의도된 해체라고 주장했다.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도 당시 대우는 외환위기에 대한 입장과 철학이 정부와 달랐다고 주장했다. IMF 위기는 금융당국의 단견과 오판으로 외환 운용을 잘못해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고, 당시 한국경제의 기초 경제여건은 건실했다고 주장했다.

이한구 전 대우경제연구소 사장도 "외환관리를 잘못한 정부당국자들과 OECD 가입조건 맞추기에 매달린 국정책임자, 그리고 IMF 말만 쫓아 국익을 무시했던 DJ 정부 당국자들이 김우중 회장이나 대우그룹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려 할 때는 너무 안타까웠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과거의 실수가 미래에 다시는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던 그는 이제 다른 세상에서 세계 경영의 꿈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가 정신이 말살당한 오늘의 한국경제이기에 더욱 절실한 일이다.

"개발도상국 한국의 마지막 세대가 돼서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다"는 고인. "우리는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고인. 그는 떠났지만 '세계 경영'이란 화두를 다시금 우리 사회에 던졌다. 반기업·친노조로 폭주하는 문재인 정부의 초라한 경제 성적표가 떠나는 그의 발길을 더욱 무겁게 할 것 같다.
[미디어펜=편집국]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