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사건이 근현대사에 무슨 기여했나?
역사를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시선 큰 문제
   
▲ 조우석 언론인
전북 정읍시가 내년부터 동학란 관련자 유족에게 월 10만원 수당을 지급한다는 소식에 마뜩치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너무도 우습기 때문이다. 2004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유족을 발굴해온 결과이고, 문체부 위탁을 받은 동학관련 재단에서 이 사업을 진행한다는데, 이참에 물어보자.

그렇게 한다고 1894년 동학란 발상지의 명예가 높아질까? 그들이 말하는 유족 복지 향상이 이뤄질까? 다른 의문도 수두룩한데, 유족 선정과정부터 그렇다. 월 10만 원 수당 지급은 신청일 현재 정읍시에 주민등록이 돼 있고 동학운동 참여자의 자녀·손자녀·증손자녀가 대상이고, 그런 기준에 따라 현재 1만 명 후손에 대해 등록을 마쳤단다. 

문제는 당시 참가자들이 노비나 소작농이었을텐데 성도 족보도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무슨 수로 후손임을 증명했단 말인가? 불투명한 그 과정부터 꺼림칙하다. 그 근본적으론 120년 전 그 사건이 근현대사에 어떤 기여를 했다는 것인지조차 모호하다.

동학운동은 혁명도 근대 정치운동도 아닌 존왕양이(尊王洋夷)의 반동적 성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마구집이 역사 인식 아래 정부가 월 수당을 후손에게 덜컥 지급한다? 사질 증·고조부의 행적을 아는 후손이 있다는 것부터 의아한 데, 이러다가 임진왜란 유공자 유족들이 "우리에겐 왜 수당 안 주느냐?"하고 들고 일어날 판이다. 

   
▲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 진사는 황해도에서 동학군 토벌군을 운용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다 안다.

박근혜 대통령 집안과 안중근 집안

내 눈에 한국사를 저항사 일변도로 바라보는 운동권적 시선이 가장 큰 문제다. 바로 그게 이 코미디 행정을 만들어낸 힘이 아닐 수 없는데, 또 하나 역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보는 시선도 못내 걸린다. 어디 역사가 선악사관으로 쫙 가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아닌 소리다. 

손쉬운 사례가 박근혜 대통령 집안이다. 이번 수당 지급이 만일 정읍시를 넘어 다른 지자체로 확대 적용된다면 당연히 박 대통령도 혜택을 볼 것이다. 왜? 그의 조부 박성빈은 1892년 경북 성주에서 동학 접주(接主)로 활동했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박 대통령이 수당을 받는 걸 좌파들이 원할까? 그보다 더 생생한 사례는 안중근 집안이 아닐까?

안중근의 부친 안 진사가 황해도에서 동학군 토벌군을 운용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다 안다.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를 되읽어보라. 그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과 백범은 10대 시절에 원수이자, 은인 사이로 만났다. 백범이 동학란 실패 뒤 안 진사의 황해도 신천 집에 오래 은신하기도 했다.

그게 묘한데, 당시 안 진사는 동학 토벌대장이었고, 백범은 당시 "아기 접주"로 불리던 활동가였으니 둘은 원수지간이 맞다. 절묘한 건 동학란의 와중에도 서로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상대방을 해치지 않는다"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안 진사에게 몸을 의탁했던 것도 그런 큰 신뢰 때문이었다.

당시 안 진사 집에서 백범이 발견했던 한 호방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안중근이었다. 백범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는 초패왕 같은 대장부 삶을 살겠다면서 사냥에 몰입했다." 요즘 말로 진영이 달랐던 건 문제되지 않았다. 더 흥미로운 건 훗날 백범이 안중근의 조카딸(미생)을 맏며느리로 맞은 점이다. 두 영웅 가문은 원수에서 후원자로, 후원자에서 혼맥(婚脈)으로 다시 뭉쳤다. 

그래서 이걸 두고 100년 전 근현대사의 위대한 우정이라고 나는 말하곤 하는데, 그런 아름다운 얘기가 전부는 아니다. 역사란 비틀거리며 진행되거나, 종종 그늘을 만들어내는데, 그 사례로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의 이야기를 기억해둬야 한다. 천하의 애국지사 안중근이지만, 차남은 사뭇 달랐다. 

   
▲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중근과 백범은 10대 시절에 원수이자, 은인 사이로 만났다. 백범이 동학란 실패 뒤 안 진사의 황해도 신천 집에 오래 은신하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안중근의 차남은 왜 친일을 했나?

그는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 얘기는 10년 전에 나온 단편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 등장한다. 이 소설에는 고뇌하는 안중근의 모습과 함께 일제말 변절했던 안준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당시 그가 대체 뭘 했기에? 안준생의 친일행각이란 1939년 말 중국 상하이에 살던 안준생이 총독부의 기획 공작으로 귀국하면서 시작한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기치와 함께 혼령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 지금 장충단 자리)에서 아버지의 잘못을 사죄한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를 내선일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안준생이 미나미 지로 당시 총독의 양자가 됐다는 말이 있다.

미나미로부터 받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와 약국을 차려 돈을 벌었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다. 때문에 안준생은 해방된 조국 땅에 '의사 안중근'의 아들로 당당하게 귀국하지 못하고, 숨어들어오듯이 귀국해야 했다. 그런 이력 탓에 그는 1952년 부산 피난생활 중 폐결핵으로 46세를 일기로 덴마크병원선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했다. 자, 어떠신지? 바로 이런 게 역사이고, 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불과 3~4대가 진행되는 짧은 과정에서 극과 극으로 오가는 널뛰기가 펼쳐진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역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고 후손에 돈을 뿌리는 좌파의 시선이 얼마나 웃기는가?

당연히 유족 복지 향상이란 구호도 빛 바랜다. 그게 바로 정읍시가 동학란 관련자 유족에게 월 10만원 수당을 지급한다는 소식은 역사 농단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더 냉정하게 말해 코미디다. 참고로 정읍의 재정 자립도는 14.5%에 불과하고, 전국 시·도시 중 200위 정도다. 이쯤에서 역사 농단을 접는 게 도리라는 조언을 나는 이 정부 관계자들에 전하고 싶다. 정신줄 좀 잡고 살자.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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