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6.25전쟁에서 38선을 돌파...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한 날
   
▲ 김규태 미디어펜 재산권센터 간사/연구원

10월 1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군의 날’, ‘이 때문에 한 때 공휴일이었던 날’이라고만 알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만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이 땅에 일어났다. 1946년부터 1953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10월 1일 아로새겨졌다.

1946년 대구 10.1 사건,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

먼저 대구 10.1 사건이다.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이 대구 10.1 사건 등의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의 유탄에 의해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 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김일성과 박헌영 

당시 미군정 체제에서의 치안정국은 국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으로 혼란스러웠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좌익과 그에 반하는 우익이 계속해서 대립하던 시기였다. 사실 미군정부터 6.25전쟁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의 참화나 폐해를 전혀 겪지 못한 70~80% 가량의 국민이 공산주의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건 직후,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정백과 이영)이 긴급 회동을 갖고 대구 10.1 사건은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음을 상기해 보면, 대구 10.1 사건은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공산주의 운동가와 좌파 정치세력이 스스로 무덤을 파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은 사건이다.

남한에서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나던 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이 평양에서 개교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 하나. 김일성종합대학은 150명의 교수진을 갖추어서 개교했는데, 그 중 100명이 남한에서 월북한 지식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 남한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 과거의 하늘을 지키던 F-51 무스탕과 현재의 KF16 /대한민국 공군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1949년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

이로부터 3년 뒤인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육군항공사령부가 국방부 항공국과 통합하여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된다. 당시의 공군 전력은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은 L-4 연락기 10대 뿐이었다. 열악하다고 표현하기도 부족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공군은 6.25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눈부신 전력 급신장을 이루어, 현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전술기 460대, 감시통제기 40대, 공중기동기 40대, 훈련기 180대, 헬기 40대 등 동북아에서 손꼽히는 항공전력을 갖추고 있다.

1950년 38선 돌파, 김일성에게 항복 권유

이듬해인 1950년 10월 1일은 한반도가 6.25 전쟁 한복판에 있을 때였다. 당시는 인천상륙작전이 크게 성공하여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완전히 무너져서 남한 지역이 실질적으로 수복된 시점이었다. 서울은 1950년 9월 수복되었으며, 당시 아군 지도부가 맞은 문제는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이었다.

참전의 목적이 남침한 북한군을 격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들은 북한으로의 진격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9월 29일 유엔군 총사령부가 모든 작전 부대들에게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국제적인 정세는 달랐다. 전황이 갑작스레 호전되자 미국 여론도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국제 여론도 북한으로의 진격에 대해 점차 호의적이 되었다. 적어도 한국군의 진격은 허용될 수 있다는 얘기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 이승만 대통령 

이 때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한국의 정치적 의지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의 결정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단숨에 정리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북한이 일으켜서 수십 수백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전쟁을 38선에서 멈춘다는 것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유엔군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자 국군에게 북한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한국군 육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이 명령을 내려, 대한민국 육군 3사단 26연대가 동해안에 인접한 38선 북쪽의 고지를 점령하고자 6.25 전쟁 발발 후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26연대가 이튿날 점령한 곳은 양양이다. 이것이 10월 1일 ‘국군의 날’의 유래이다. 이 날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도쿄에서 방송을 통해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1950년의 10월 1일은 당대의 사람들을 비롯하여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심정적으로 통쾌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년이 지나 1953년 10월 1일에 있었던 사건은 당대의 사람들이 보자면 사건의 진의와 여파를 제대로 알 도리가 없던 일이었다. 1953년 10월 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이다. 1)

   
▲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1953년 6월 미국 주도로 휴전 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 이승만은 휴전에 앞서 안정적인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에 상호 방위 조약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양자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던 나라는 필리핀 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한국, 영국, 일본, 필리핀 4개국에 불과하다. 참고로 영국은 미국 핵기술을 제공하기 위한 조약이며, 일본은 재무장 금지와 맞물려 있는 조약이다.

상호방위조약의 진전이 미미하자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2만 5천여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으로 석방해 버린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력히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였지만, 휴전협정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조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약속 파괴'라며 비난했고, 거의 모든 미군부 인사가 이승만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 제거'의 필요성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3일부터 협상에 들어가, 1953년 8월 8일 최종안을 서울에서 가조인한다. 10월 1일은 워싱턴DC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약에 서명한 날이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하여 이승만은 크게 만족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의 예측대로 지난 61년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나라가 누리는 풍요로움의 안전을 담보하는 안전판으로 작용했다. 북한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함과 동시에 일본의 팽창주의적 사고도 저지시키는 이중의 역할 말이다. 조약은 휴전 이후 반세기 동안 `긴장 속의 평화`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한국이 빠른 성장을 통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조약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1953. 10. 1. 워싱턴에서 서명
1954. 11. 18. 발표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인식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평화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이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생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제 1 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 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가할 것을 약속한다.

제 2 조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정이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와 상호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여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제 3 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영토 또한 금후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관리 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제 4 조
상호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제 5 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 의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에 효력을 발생한다.

제 6 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일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하였다.

본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문과 영문의 2통으로 작성되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변영태
미합중국을 위하여 존 포스터 델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