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납품 사실 자랑, 뼈깎는 원가절감 부품업체 대일수출 되레 급증

옆 사람 주머니가 궁금한 사회

부자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의 시선은 어김없이 그쪽으로 집중된다. 그들의 집값은 얼마인지, 자가용 제조사는 어디인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는 언제나 따가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상위 1%가 전체에서 몇%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지만, 정작 상위 1%가 전체에서 몇%의 부를 '차지해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적어도 어떤 상태를 두고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정의로운 상태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경우, “부가 '너무’ 집중되어 있다”, “소득 격차가 '과도하게’ 벌어졌다”, 따위의 모호한 언어들로 포장되어, 좀체 어떤 것이 '정의로운 상태’인지 밝히지 않는다.

상위 1%가 68%의 부를 차지한다면, 이것은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않다면, 상위 1%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차지해야 정의로운가? 59%? 47%?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여기에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숫자는 좋고 나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통계적으로 산출된 숫자는 그저 계산 결과일 뿐, '1%가 소유한 양’ 이외의 그 어떤 정보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의를 논하고자 한다면, 결과를 볼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따져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따져보자. 그들이 가진 돈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

당신이 만들어 낸 불평등

엄청난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 가진 돈은 결국, 당신이, 자발적으로 갖다 준 돈이다. 무슨 소리냐고? 주위를 잠시 둘러보라. 멀리 있는 거 볼 필요도 없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의 바로 눈앞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SSM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대형마트가 전통시장을 '밀어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밀어내고 밀려나는 관계는 존재한 적이 없다. 누가 시장을 더 먹었고 덜 먹었느냐의 경쟁이 있었을 뿐. 결국, 전통시장을 '밀어낸' 것은 우리 스스로였다.

생각해보라. 대형마트가 전통시장을 죽였다고 침 튀기며 삿대질하면서, 포인트카드는 꼬박꼬박 적립한 게 누군가? 바로 당신 아닌가? 우리가 전통시장에 갔더라면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대형마트에 갔기 때문에 영세상인과 전통시장이 망했는데, 가슴이 아프다며 대형마트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닌가.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들을 다 '쫓아내’고 작은 먹거리까지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하겠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대기업들에는, 동반성장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그렇게 불쌍한 중소기업을 냉혹하리만큼 외면한 게 누군가? 바로 당신 아닌가? 당신이 그 '동반성장’의 따뜻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더라면 중소기업이 '쫓겨날’ 일은 없었지 않나? 그런데 당신은 왜 중소기업 두부를 버리고 대기업 두부를 골랐나? 왜 중소기업 타이어를 버리고 대기업 타이어를 선택했나? 중소기업 제품은 왜 도무지 팔리지를 않는가? 좀 사 주지 그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들 손에 돈을 쥐어다 주면서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불평등 통계를 들여다본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가 대표적이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나? 결국, 당신을 언짢게 했던 불평등은, 당신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 셈이다.

불평등이 정의로운 것이냐고? 당신은 정의로운가?

자유로운 거래의 힘

우리가 부자들에게 돈을 주며 '불평등’을 만들어 냈듯, 자유롭고 자발적인 거래는 거꾸로, 돈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몰락시킬 수 있는 섬뜩한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로 다 죽는다던 우리나라 부품업체들은, 뼈를 깎는 단가절감과 기술개발의 노력 끝에 세계 시장으로 뛰어 나가 활개를 치는 중이다. 2013년 자동차 부품업체의 대 일본 수출액은 2010년 대비 40% 이상 급증했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22% 급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최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엄청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본문 '제 1법칙’ ( α = β × r , 자본소득/국민소득 = 자본스톡/국민소득 × 자본수익률 ) 에서, 자본수익률(r)의 값을 주어진(given) 것으로 봤고, 그의 전개과정에서 자본(β)은 그 존재만으로 자본소득(α)을 결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돈은 쌓아두기만 해서는 결코 스스로 증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부가 어디에서 왔었고, 과연 누가 그 불평등을 만들어냈었는지를 되짚어 보자. 수요와 욕구를 절묘하게 꿰뚫어 시장을 창조한 사업가는, 많은 돈을 벌어모아 높은 자본수익률을 얻을 수 있고, 안타깝게도 그에 실패한 사업가는 낮은 자본수익률, 어쩌면 엄청난 적자를 떠안게 될지도 모른다.

한때 휴대폰 시장을 제패했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경쟁에서 신흥 경쟁업체에 부대끼며 고전 중이고, 카메라 시장의 골목대장이었던 코닥은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가파른 몰락의 길을 걷지 않았는가. 그 어떤 자본가도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지 않으면,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50년 전 우리나라 100대 대기업 중 무려 93개 기업이 아예 망하거나, 순위에서 이름을 깨끗하게 지웠다.

자본수익률이 주어진 값이라고? 자본이 있기만 하면 자본소득이 자동으로 나온다고? 천만의 말씀. 방심하는 찰나, 소비자는 돈을 들고 경쟁업체로 몰려가, 바로 그 '자발적인 불평등’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자유로운 거래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안주할 수 없다.

Win-Win의 경제학

이 자유롭고 자발적인 거래의 힘은, 소비자로부터 시작되어 기업에까지 적용된다. 역설적이게도, 대기업의 '착취’, '갑질’, '횡포’라는 표현은 예외 없이 자발적으로 성립된 거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스스로 착취당하기를 갈망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나. 그래서 자유로운 거래는 정말로 '못된’ 기업을 필연적으로 망하게 한다. 만약 근로자를 착취하고, 하청업체에 갑질하고, 소비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기업이 있다면 당장 거래를 끊고 뛰쳐나오길 바란다.

거래 상대는 무궁무진하다. 세계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중인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나. 거래가 성립하고 유지된다는 건, 당사자 양측 모두 그를 통해 얻어가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다. 이건 Win-Win 게임이다. Zero-Sum 게임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단가 후려치기’로 하청업체의 고혈을 빨아먹는다는 대기업을 비판한다. 그 '절제되지 않은 탐욕’은 결국, 우리가 시장에서 낮은 가격을 선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은 채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토록 착취당한다는 중소기업 홈페이지에 가 보면, 자신들의 제품을 대기업에 납품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어둔다. 그들의 눈에 중소기업이란, 자신이 착취당함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성인군자로 보이는 걸까.

무겁고 답답한 브라운관 TV 대신, 얇고 선명한 LCD TV가 안방을 차지하기 시작한 건, 2004년 말 1,800달러 수준이었던 LCD패널 가격을, 지난 3월 기어코 120달러까지 떨어뜨린, 피눈물 맺힌 단가 후려치기의 결과였다. 덕분에 우리의 거실이 더 넓고 깔끔해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웬만한 대학생이 개인용 랩탑 하나 정도는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연관 제품의 가격이 덩달아 곤두박질친 '문명의 혁신’이 일어났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문명이 확산되고,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되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착취’당했다는 중소기업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더 힘들어졌겠는가?

그뿐이겠는가?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로 다 죽는다던 우리나라 부품업체들은, 뼈를 깎는 단가절감과 기술개발의 노력 끝에, 세계 시장으로 뛰어 나가 활개를 치는 중이다. 2013년, 자동차 부품업체의 대 일본 수출액은 2010년 대비 40% 이상 급증했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22% 급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대한민국이 태동하기도 전인 일제강점기부터 기술을 축적해 온 일본에,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다. 일본업체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아듣는 미국과 독일의 주요 완성차업체들과의 무역에서도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는 중이다. 부품업체들의 약진은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최근 중국 신흥업체들의 스마트폰이 고급화되면서 주요 핵심부품을 한국에서 공수해 오기 바쁘다. 국내 주요 스마트폰 부품업체들의 매출은 2011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뛰었다.

과연 이것을 '착취’의 관점에서 봐야 할 문제인가? 업체들이 지금 힘들고 벅차니, 단가를 깎고, 품질을 올리는 노력을 요구하지 말라고 주문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는가? 오늘의 성공은, 우리가 그렇게 '단가 후려치기’라고 비난하던, 기업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부터 얻은 결과다.

우리 모두의 이기심이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부자들과 대기업을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에게는 그럴 이유도,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관점도, 처방도 바로 설 수 있다. 만약 당신이 Zero-Sum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너무도 좁은 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되돌아보는 건 어떻겠는가. '불평등’이 그랬고, '착취’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당신이 분노하며 비판했던 것들이, 사실은 당신 스스로가 내린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면 어떨까.

그 어떤 규칙과 잣대를 들이대 막아보려고 해도, 이기심은 그 좁은 틈을 타고 반드시 다시 피어난다. 우리가 아무리 이타적이고 따뜻한 사람인 체해도, 우리는 결국 이기적인 선택을 내렸던 것처럼.

바로 그래서,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이 손해 보는 거래는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발적인 거래는 언제나 Win-Win에서 성립한다. 시장에서 개인의 이기심은 그렇게 치열하게 부딪히고, 치열하게 균형을 이룬다.

거대한 시계탑의 복잡하고 날카로운 톱니도, 서로 맞물리면 돌아가듯,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서로 협력하는 존재다. /이주석 카이스트 무학과 학생
 

(이 글은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