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징벌일까 튀틀린 질투의 복수일까...사랑과 권력 사이 극한적 비극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32) - 사랑과 권력의 욕망이 충돌한 비극 에우리피데스(BC 484?~BC 406?)의 <메데이아>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악녀로 알려진 여인은 누구일까? 아마 많은 이가 메데이아를 꼽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도 악처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이는 지나친 오명(汚名)이다.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초탈한 삶을 생각하면, 생활인으로서 부족함이 많았던 소크라테스에게 쏟아진 크산티페의 ‘바가지’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크산티페는 메데이아와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다. 메데이아가 악녀로 등극한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어린 두 아들을 살해한 잔혹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죄악 그 자체만 놓고 그녀를 단죄하기에는 그녀의 삶의 비극적 상황이 너무나 애절했던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메데이아는 사랑을 위해 인륜을 저버린 비정한 질투와 증오의 화신일까? 메데이아를 놓고 그녀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주류이지만 그 반대의 해석도 적지 않다. 이아손에게 배신당한 메데이아가 겪은 고통의 심연에 공감하는 작품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크리스타 볼프(1929~2011)가 지은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같은 작품이 그런 예이다. 메데이아를 남성의 권력욕에 희생된 탁월했던 한 비운의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다.

아무튼 메데이아가 잔인하게 두 아들을 살해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가 쓴 『아르고호 이야기(Argonautica)』에 나오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 이야기의 이면부터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첫 만남과 그들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 나타난 사랑의 온도 차이도 주목해 봐야 한다. 이아손이 콜키스에서 황금양피를 구해 그리스로 무사 귀환하는 과정에서 메데이아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구사일생하게 되는 사연도 되돌아봐야 한다. 메데이아의 복수심의 뿌리는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인류가 낳은 4대 비극작가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이다. 이 중 고대 그리스 작가가 무려 3명이나 된다. 2500여 년 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은 비극 작품들이 이들에게서 나왔다. 이들 세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이는 에우리피데스이다. <메데이아(medeia)>는 그의 대표작품이다.

<메데이아>는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가 쓴 『아르고호 이야기(Argonautica)』에 나오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풋풋했던 사랑이 어떻게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결혼 생활에서 불행한 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는 이아손이다. 그는 메데이아와의 평탄한 결혼 생활을 통해 두 아들까지 얻었다. 불화의 씨앗은 이아손의 정치적 야망이다.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왕의 사위가 되고자 했던 그의 권력욕이 자신의 파멸은 물론 메데이아와의 갈등 야기로 인해 가정의 파멸을 가져온다.

   
▲ <메데이아>, 빅토르 모테(Victor Mottez, 1809~1897) 작, 증오와 분노심에 떨고 있는 메데이아와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두 아들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를 이룬다.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왕녀와 결혼하려던 그에 대해 메데이아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맹렬하게 폭발했다. 그녀는 흑해의 동쪽 콜키스에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국가의 보물인 황금양피를 이아손에게 넘겨주었다. 또 그리스로 도피하는 과정에서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추격하던 동생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가족을 배신한 것이다.

『아르고나우티카(Argonautika)』에서는 그녀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아손을 따라나선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반면 <메데이아>에서는 메데이아가 자신의 입으로 “납치되어 와서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넋두리한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동행했든 납치되었든, 그녀는 결과적으로 그리스에서 “외돌토리고, 고향 도시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고독한 상태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아손은 자식과 가족들의 지위를 높이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왕녀 글라우케와 결혼하고자 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미리 솔직하게 자신을 설득했었어야 했다고 공박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자신을 야만족의 여인이라고 거추장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자격지심까지 갖고 있었던 듯하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만들어 주겠다는 그런 행복과 부는 자신에게 고통만 가져다주는 헛된 것일 뿐이라고 절규한다.

이아손의 확고한 결혼 의지와 졸속 추진에 메데이아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이아손과 자신의 딸의 결혼이 야기할 메데이아의 복수가 두려운 크레온 왕은 메데이아와 두 아들에게 국외 추방 명령을 내린다. 극한 상황에 몰린 메데이아가 대응하는 방식은 처절한 복수다.

간절한 호소로 하루 동안 추방을 연기시킨 메데이아는 두 아들에게 왕녀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독이 묻은 선물을 보내 그녀를 독살한다. 그녀의 죽음에 애통해 하던 크레온 왕 역시 독의 전염으로 죽게 된다. 주술과 마법에 능했던 그녀의 마술사적 역량이 최악의 상황으로 발휘된 것이다.

   
▲ <격노한 메데이아>, 외젠 들라크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 작, 두 아들을 죽이려는 증오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의 메데이아와 공포에 질린 어린 아들의 표정이 어울린 급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복수의 절정은 어린 두 아들의 살해로 치닫는다. 메데이아가 천진스런 두 아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려는 독기의 절규는 인간이 얼마나 모질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녀가 모정과 질투와 증오심 사이에서 겪는 극심한 심리적 갈등 상황에 대한 에우리피데스의 묘사가 섬세하여 읽는 이마저 몸서리치게 한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메데이아의 분노의 광기는 인간의 극한 상태를 보여준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아손의 절규처럼 “사악한 어머니”인가? 아니면 메데이아의 반박처럼 “아버지의 악덕”인가?

이아손의 “교만과 새장가”가 만들어낸 메데이아의 분노의 증오심은 이아손의 씨앗인 자신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랑의 배신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지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이 다를 듯싶다.

물론 모정을 저버린 잔혹한 메데이아의 ‘아들 살해’라는 대리 복수는 세인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메데이아가 자신의 동생을 죽이거나, 이아손의 숙부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를 잔인한 속임수로 죽이는 대목에서 메데이아의 잔혹한 성정은 이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아손 역시 황금양피의 약탈 과정과 귀국 이후의 그의 삶의 여정에서 보여준 소극적인 모습에서 영웅다운 면모를 찾을 수 없다. 고난과 위기를 스스로 헤쳐 나가기보다 메데이아에 의존했던 그가, 메데이아의 탁월한 역량을 긍정적으로 활용해내지 못하고 파멸의 부메랑이 되도록 한 것은 오히려 이아손의 귀책이 아닐까?

에우리피데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성정(性情)이 남녀 간의 사랑과 욕망이 어떻게 다스려지느냐에 따라 얼마나 극명하게 변화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은 결국 인간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메데이아가 만들어낸 극한적 비극 또한 궁극적으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픈 질문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Ⅰ』,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