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사옥 인수 현대미술의 큰손 (주)아라리오 김창일 회장과의 대화<상>

(주)아라리오 김창일(64) 회장은 세계 200대(大) 미술품 컬렉터의 한 명으로 유명하다. 한국인으로는 그가 유일한데, 그런 김 회장이 요즘 잇달아 사고를 치고 있다. 제주국제공항에서 10여 분 거리인 탑동에 미술관 세 곳을 10월1일 동시 오픈했다. 김창일의 예술영토가 제주도까지 넓어진 것이다. 한 달 전 그는 서울의 도심에서도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화제를 뿌리며 인수했던 건축가 김수근(1986 작고)의 대표작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 에 대한 리모델링을 끝내고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란 이름으로 9월1일 오픈했다. 구(舊) 사옥은 전시공간으로, 새로 지은 유리 건물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꾼 변신이다. 경영자이자, 미술작가이기도 한 그는 도깨비가 맞다. 며칠 전 제주도 미술관 오픈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꿈을 이룬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 노래를 참을 수 없다 "며 가수 전인권의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러제쳤다. 청년 같은 설렘과 에너지의 김창일, 전에 없던 문화 비지니스의 최전선에 선 그와의 대화를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그와의 대화는 우리시대의 문화 경영에 암시를 준다. 다음은 '상' 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지난해 문화계 최대 뉴스의 하나는 ‘공간’ 사옥의 주인이 바뀐 것이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대표작으로 유명한데, 매각 과정에서 단 한 곳의 기업이나 개인이 없어서 유찰되기 직전 등장했던 수호천사가 김창일(64) 회장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150억 원짜리 계약의 뒷맛이 묘했다. 천하의 김수근을 품은 새 주인이 시골 갑부라는 사실에 뭔가 허를 찔린 느낌이 서울 사람들에게 아주 없지 않았다. 
 

 "충남 천안 (주)아라리오 회장이라는데, 그런데 아라리오가 뭐지?" "미술계에서는 외계인으로 통한대. 직접 자기가 그림도 그린대나봐." 
 

소문 속의 그가 지구촌 현대미술을 움직이는 큰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지구촌 파워 컬렉터의 한 명인 그는 루이비통 등을 거느린 LVMH그룹 오너인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구찌나 입센로랑을 둔 PPR그룹 소유주 프랑소아 피노 회장 등과 비슷한 반열이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게 뿌듯하면서도 "그래보니 시골 졸부가 뭘…."하는 심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우린 김창일의 진면목을 볼 기회를 놓쳐온 건 아닐까?
 

사실 2000년대 초 이후 서구의 미술잡지 ‘모노폴’ ‘아트리뷰’등이 선정하는 영향력있는 미술계 인사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그가 등장한다. 궁금하다. 뉴욕, 런던, 뒤셀도르프 등을 누비며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안젤름 키퍼, 지그마 폴케,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키스 해링 등 현대미술 슈퍼스타들의 '억 소리 나는' 작품을 사들이는 정보력은 어디서 나오지? 작품은 점 당 수십 만에서 수백만 달러, 즉 수억 내지 수십 억 원이다. 2013년 가장 큰 배팅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 연작(10점)인데, 240만 달러라고 그는 당당히 액수를 밝혔다.
 

흔히 그를 기인, 괴짜, 외계인이라고 하지만, 그건 사람을 잘 모를 때 해보는 두루뭉수리한 소리는 아닐까? 그런 무관심은 예술이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자, 눈덩이 돈을 굴리는 마케팅의 엔진으로 변한 우리시대의 메카니즘에 눈감겠다는 어리석은 배짱은 아닐까? 비즈니스이건 예술이건 상대방의 눈과 가슴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직접 확인해본 그는 명쾌했다. 합리적인 비즈니스맨이고, 뭘 아는 팝아트 작가였으며, 순수함이 살아있는 파워 콜렉터이자 화상(畵商)이었다. 문화 마인드가 어떠니 하는, 수식어도 그에겐 진부하다.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dream, therefore I am.)
인터뷰 중 '운명'이란 용어와 함께 그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문장이 그것인데, 라이프 스토리를 알아야 그 말의 무게가 감지된다. 1970년대 후반 그는 지방의 한 버스터미널 내부의 가게 임대 운영을 갓 시작했던 새파란 20대 청년이었다. 그 안의 매장 네 곳에서 껌 팔고, 알사탕을 팔던 구멍가게로 시작했으니 초라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이후 10여 년 뒤 터미널 전체를 인수했다. 뭔가 달라도 달랐던 그는 지금은 완전 거물로 변신했다.

본래는 버스터미널 구멍가게에서 껌과 과자 팔던 청년 김창일

백화점(신세계백화점 충청점), 멀티플렉스(야우리시네마), 화랑(천안-서울-뉴욕 등의 아라리오 갤러리)을 보유한 아라리오 왕국을 일궈낸 주인공이다. 그게 모두 ‘천안의 명동’인 신부동 2만여 평 안에 모여있다. 옛날 후미진 동네가 맛집과 쇼핑점 그리고 아트의 후광에 싸인 명소로 탈바꿈했다. 맞다. 이제 김창일은 새로운 문화 비즈니스의 성공시대를 알리는 멋진 이름이다. 그걸로 한 도시의 얼굴을 몽땅 바꿔놓은 우리시대 진정한 마술의 연출자라고 해도 좋다.

   
▲ 지난해 문화계 최대 뉴스의 하나는 ‘공간’ 사옥의 주인이 바뀐 것이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대표작으로 유명한데, 매각 과정에서 단 한 곳의 기업이나 개인이 없어서 유찰되기 직전 등장했던 수호천사가 김창일(64) 회장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 확인해보니 이곳이 바로 한국미술의 1번지네요."
인터뷰 약속 1시30분 전에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앞에서 미리 마중 나와있던 그에게 수인사는 당연했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백화점 앞 조각광장이 이 정도로 멋진 줄은 미처 가늠 못했다. 세계 어떤 도시의 상업지구를 최고의 현대미술로 덮은 곳은 드물거나 없다. 수준과 밀도로만 따지면 유례가 없다고 단언해도 된다. 일테면 999대의 자동차 차축을 5층 건물 높이로 쌓아올린 아르망 페르난데스의 '수백 만 마일'은 이 공원의 늠름한 수호신이다. 그 옆에 국내작가 성동훈의 '돈키호테'도 있지만, 몇 년 새 풍경이 거의 완전하게 바뀌었다.
 

데미안 허스트의 '체러티', 수보드 굽타의 '통제선', 키스 해링의 ‘줄리아’, 수이젠궈의 '쥐라기 시대'…. 무엇보다 일본작가 코헤이 나와의 '매니폴드'가 화룡점정이다. 두둥실 거대한 구름 같은 이 작품은 스케일이 대단하면서도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붕 띄워준다. 당신이 굳이 현대미술이란 걸 잘 몰라도 된다. 누구라도 뭔가 근사한 아우라가 느껴질텐데, 어쨌거나 이런 작업을 40년 세월 가까이 디자인해온 김창일 회장이란 사람이 다시 보였다. 30여 분 사이에 이 곳 전체를 일일이 가이드하며 작품을 소개해준 그에게 인사를 새로 했다.
 

-아까 한국미술 1번지라고 했나요? 그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여기가 세계미술 1번지이구만요.
"뭐, 우린 느낌을 아니까~(웃음)"
-요즘 유행어도 다 아시네요.
"어제 일요일도 개콘을 다 봤어요. 저는 그걸 매주 보거든요."
 

-그런 걸 봐야 요즘 젊은 트렌드를 알 수 있고, 비즈니스하시는데도 도움되나요?
"아닙니다. 그 이전에 저는 인간적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 끌리는 겁니다. 저 그런 거 아주 좋아해요. 인간에 대한 풍자가 있고, 언어를 비트는 장난도 얼마나 유쾌합니까. 개콘도 보고 TV 뉴스도 챙겨보지만, 전 드라마는 거의 못 봐요. 간혹 소리 지르고 사악한 장면 같은 걸 보면 너무 무섭고 잠 잘 때 혹시 악몽을 꿀까 두렵습니까. 제 와이프랑 일주일에 영화 두 세 편을 보곤 하지만, 해피앤딩으로 끝나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흥미롭습니다. 천안 하면 대부분 서울 사람들은 시골이라는 선입견부터 갖습니다. 서운하진 않으세요?
"대학(경희대 경영학과)을 졸업한 1978년 여기로 내려와 버스터미널 매장을 운영했지만, 저는 제가 일하는 천안이 뉴욕이고 다운타운 한복판이라고 늘 생각해왔어요. 실은 제 스스로도 미스터리예요. 천안에 살면서도 왜 당대 세계 최고의 수준을 꿈꾸며 항상 염두에 뒀고, 감히 거기에 승부하려고 덤비는 삶을 살아왔을까요? 그런 눈높이나 현대미술에서 익힌 여러 가지 감각 등이 여기까지 오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 아닙니까? 저는 '내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을테니 저를 좀 해석해주세요. 오늘 인터뷰가 뭡니까? 김창일이란 사람의 신상을 한 번 털자는 거 아닙니까? 기꺼이 응해드리죠." (웃음)

"천안에 살면서도 나는 항상 당대 세계 최고의 수준을 꿈꿔왔다!"

-궁금한 것의 하나가 경영자, 콜렉터, 작가, 화상(畵商) 이 네 가지 모습 사이에서 좀 헷갈립니다.
"그거요? 경영과 예술, CEO와 아트 사이는 서로 보완적입니다. 저의 경우 아트라는 걸 통해 디자인이란 것의 실체를 접할 수 없었더라면, 아마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세계적 수준에 근접하거나, 그 이상으로 뻗어간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아트는 저에게 소중하지만, 비즈니스에도 결정적이죠."
 

-손대는 비즈니스는 왜 미술관, 백화점, 멀티플렉스, 식당 등 딱 네 개로 국한한 겁니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경우인가요?
"아뇨. 제가 본래 낯선 것은 전혀 몰라요. 외국에 갈 때도 미술관, 백화점, 멀티플렉스, 식당만 뱅글뱅글 돌아다녀요. 제 비즈니스는 그 네 개로 국한됩니다. 다른 영역은 관심이 아예 없고, 그런 걸 모른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중국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던 갤러리인 아라리오 베이징을 7년 간 경영(지금은 사무실 기능만 유지하는 중이다)했지만, 남들이 모두 가본다는 만리장성은 근방에도 가본 일도 없다니까요? 제가 모르는 영역에 관한 정보는 비서를 통해 알아내면 되죠. 뭐."
 

-완전 흥미로운 캐릭터이고, 다분히 편집광적 기질도 있어보이는데, 어쨌거나 남보다 에너지가 넘치니까 여기저기 뛰고 활동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것도 아니예요. 에너지가 퐁퐁 솟진 않아요. 저의 경우 에너지를 잘 콘트롤하고,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건 아예 손을 대지 않습니다. 또 저는 작품을 하건, 공간 사옥 매입이건 모두 생각의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간 뒤에야 비로소 결정합니다. 제 나름의 명상이고, 일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 과정입니다. 하루 일과도 아주 단순합니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약간 운동한 뒤 명상하고, 그림 그리고, 책 읽고…."(김창일의 스타일 혹은 본질을 슬쩍 엿본 순간이다. 큰장사꾼은 외양과 또 달리 의외로 고요했다. 사실 그는 오지랖이 넓거나 처음 만난 사람과 쉽게 형님 아우하는, 이른바 화통한 타입도 아니다. 그를 보필하는 아라리오갤러리의 디렉터 한 명이 귀뜸했다. '회장님은 에너지의 10분의 1만을 경영에 쓰세요. 나머지는 당신의 놀이터인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책 보고 하며 노시는 거죠.")


   
▲ 1970년대 월 300만원씩 적자가 나는 천안버스터미널 운영을 맡은 김창일 회장은 잠깐 사이에 연 순익 1억 원을 내는 청년사업가로 성공했다. 그 비결은 당시 아무도 터미널 내 매점을 직영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는 직영을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 100원, 200원을 현금으로 받는 일이라서 남에게 맡기는 게 관례였지만 그는 직영으로 새는 돈을 막았다.

"내가 내린 경영상의 결정은 실패해본 일이 거의 없다"

-공간 사옥 매입은 혼자 결정했고, 1시간 30분만에 결심을 끝냈다면서요.
"맞습니다. 단 즉흥적 결정과는 달라요. 저는 사안의 본질에 도달해야 하고 내적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움직이는데 그런 과정을 한 시간 반 거쳐 진행했던 겁니다. 음, 전투기 조종사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조종석에 앉아 충분히 전후방을 주시한 상태에서 레이다망에 뭐가 걸려들었다는 걸 완전히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제가 내린 결정은 실패해본 일이 거의 없다고 자부할 수 있죠."
 

-콜렉션 3700점의 절반 가까이는 실패작이라고 언제던가 고백을 했다면서요. 사실 50%를 훌쩍 넘기는 승률은 그 자체로 엄청나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요즘 저는 제주도에서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지내요. 더 묵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와이프에게 쫓겨날까봐 천안에 다시 돌아오는 거죠.(웃음) 올해 말에 오픈하는 모두 6개의 미술관 준비도 있고, 제주도 하도리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이자 작업실에서 지내는데, 거기에서 나를 공부하고 치유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히는 연습을 해요. 그때 투자에 대한 반성도 하긴 하죠. 왜 그때 투자에 실패했을까 라구요. "
 

-후회를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글쎄요. 스스로를 질책하는 거죠."
-놀라운 자기 확신과, 자기 질책이 공존하는군요.
"그럴 겁니다. 제가 가장 힘든 것의 하나가 '원래의 나'와 '진화한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예요. 김창일이란 사람이 원 세상에 이렇게 멍청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도 때론 들고, 또 어떨 때에는 엄청난 투자나 배팅을 척척해내는 걸 보면 스스로 기특하기도 하고…. 가끔 제 안에서 두 명의 김창일이 서로 막 싸우는 일도 있죠."
 

-공간 사옥을 살 때 스태프들이 반대하진 않았나요?
"왜 없겠습니까? 다만 아까 말한대로 조종석 레이다망에 뭐가 걸렸다는 걸 딱 본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는 겁니다. 주변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그걸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서 별 의미 없죠. 자꾸 토를 달면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당신 해고야!'라고 버럭 소리도 냅니다. 저만큼 충분히, 완전히 빠져서 고민해본 게 아니잖습니까? 참 신기한 건 말이죠. 그런 에너지 콘트롤을 터미널 매점사업 때부터 저는 나름으로 시작했거든요. 누구에게 배워본 일도 없이…."
 

-그때 나이 군대 갔다와서 복학해 졸업한 갓 스물일곱 살인데요?
"맞아요. 그때 벌써 저는 운전기사를 두고 비서를 뒀어요. 1978년에 차 면허를 땄지만, 그걸로 끝! 이후 제가 운전해본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이 모두 저에게 한 마디씩을 했죠. 젊은 놈이 왜 저렇게 거들먹거리냐고. 그건 완전히 오해입니다.

그때 제 생각은 달랐어요. 운전기사가 모는 차 뒷자석을 타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나름의 몰입을 할 수 있잖습니까? 예전부터 저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그건 머리숱이 별로 없는 탓도 하지만,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제 모습을 몽땅 노출하지 않은 채 투명인간인냥 돌아다니면서 저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죠."(그가 타는 차의 번호는 5678 연번이다. 보는 순간 사람들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는 그만의 지론인데, 그건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릴 수도 있는 대목이다.)

"천안고속버스터미널을 전국 최고로 만들기 위해 현대미술에 무한 투자"

-1989년 버스터미널을 정식으로 인수했는데, 어떻게 성공하신 겁니까? 터미널 운영이란 게 뭐 대강 그런 게 아니던가요?
"맞는 소리예요. 업계에서 하는 우스개말로, 버스터미널 사업을 10년 정도 하면 모두 돌대가리로 변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단 한 곳에만 허가가 떨어지니까 독점사업 아닙니까? 경쟁이고 뭐고가 필요없는 세계인 겁니다. 우리 터미널에 오지 마시라고 말려도 여행할 때 뭐할 때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곳이 버스터미널이란 공간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아는 한 부산이고 어디고 간에 터미널사업자 중에서 10년 이상을 넘긴 사람도 없어요. 그냥 도태되고 마는 겁니다."
 

-돌대가리라고 말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그걸 면한 겁니까?
"저는 무슨 일을 벌일 때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해야 필이 옵니다. 터미널 사업을 할 때 만든 모토는 이랬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벌이 날아와 꿀을 만들어낸다. 더러운 꽃은 파리가 날아와 전염병을 옮겨준다.' 즉 터미널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깨끗하게 관리하자는 것, 그것에 더해서 하나를 더하자는 게 제 복안이었습니다. 즉 아름다움 그 자체인 현대미술에 투자하자는 것이죠. 그게 (주)아라리오의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조각공원 내 아르망의 '수백 만 마일' 앞의 표지 설명이 인상적이다. 버스터미널 전체를 인수하던 무렵인 1989년 7월 김 회장의 이름으로 쓴 꽤 긴 설명인데, "터미널 사업자인 저는 국내는 물론 미국 그레이하운드터미널이나 일본 나고야 버스터미널 등을 현장방문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는 예사롭지 않은 고백으로 시작된다. 외국의 유명 터미널이 유명 작가의 조형물들을 설치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이미 탈바꿈한 사실을 그때 알았고, 충격과 깨달음을 함께 얻었다는 것, 그래서 천안터미널도 대중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변신한다는 자신의 꿈과 비전을 담았다. 무려 25년 전의 그 글은 지금 되읽어보니 김창일의 문화 독립선언서로 읽힌다.
 

-그 전에 매점 직영으로 연 1억 원 이상씩 흑자 행진을 시작했다는데, 그 얘기는 어떻게 됩니까?
"하하하 오해 좀 풀어주세요. 어머니가 넘겨준 버스터미널을 제가 거저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그거 잘못 알려진 겁니다. 실은 어머니가 그때 돈으로 한 3억 원대의 돈을 받을 걸 대신해서 버스터미널을 덜컥 넘겨받으셨던 겁니다. 그때 어머니 말씀이 '네가 천안에 내려와서 운영을 맡으라는 것이고, 단 월 300만 원씩만을 달라시는 건데, 막상 맡고 보니 월 300만 원씩 적자이더라구요. 그럼 계산이 어떻게 되죠? 순익이 월 600만 원을 올려야 겨우 굴러가는 구조인데, 저는 그걸 잠깐 사이에 연 순익 1억 원을 내기 시작했죠."
 

놀랍다. 1970년대 말 그 시절에 연 순익 1억 원이면 아주 괜찮았던 성적이다. 그런 청년실업가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 상식적이면서도, 미술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얘기다. 그때는 아무도 터미널 내 매점을 직영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는 직영을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 100원, 200원을 현금으로 받는 일이라서 남에게 맡기는 게 관례이고, 그러면 운영이 부실해지고 뒤로 줄줄 새는 돈도 많고 그랬는데, 그걸 다 아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 손댄 게 지저분한 나무 매대를 몽땅 들어낸 뒤 산뜻한 알루미늄 섀시로 새 단장하고, 모든 상품을 일목요연하고 깔끔하게 재배치했다. 김 회장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현대미술에서 말하는 설치미술과도 통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다음 회 인터뷰에서 그는 "감동이 살아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시장이 알아줍니다"라고 밝히면서 독자적인 경영철학을 소개했다. 미술 콜렉션이란 보통 부자들이 뛰어드는 최후의 취미인데, 김창일에게 미술이란 실은 첫사랑이었다는 말도 들려줬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