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는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위한 봉사자

좌파가 시장경제 비판을 위해 만들어낸 별칭이 자본주의란 말

   
▲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요즘 대한민국의 서점가에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21e siècle)≫ 번역본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독서시장의 이러한 판매고를 보면, 그간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주는 교훈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북한을 추종하는 주체사상파의 선전활동 때문인지) 아직도 화석화된 좌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케티의 이 책은 마르크스의 19세기 ≪자본(Das Kapital)≫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피케티의 결론인 80% 소득세 안도 '법 앞의 평등’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여 약탈을 부추기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실천계획안 제2조 높은 진보세(Progressive Tax, 실제로는 퇴보세 Retrogressive Tax) 적용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일찍이 마르크스의 19세기 ≪자본(Das Kapital)≫은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악용해서 노동가치를 몽땅 차지하는 자본가를 약탈해야 할 합리적(?) 이유를 마련하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창안하여 시장경제의 멸망의 객관적(?) 필연성을 제시하고, 임금철칙설을 활용하여 생존투쟁 차원에서 시장경제를 전복시킬 주체적(?) 필요성을 제시하였던 바 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21e siècle)≫도 '신고전파 경제학’을 악용하여 '자본수익율 > 경제성장율’ 식을 가지고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자들을 약탈해야 할 합리적(?) 이유를 마련했다. 그러나 피케티가 창안한 식은 시장경제 멸망의 객관적 필연성도 시장경제 전복의 주체적 필요성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이름에도 불구하고 21세기판 마르크스는 아니고 난장이 마르크스쯤 되겠다.

'효용가치설’에서 출발한 그는 '노동가치설’에서 출발했던 마르크스와는 달리 그는 '자본수익율 > 경제성장율’ 식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전개했기에 시장경제가 망하리라는 객관적(?) 필연성도 만들지 못하고,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전개했기에 노동자가 피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복을 이루어야 할 주체적(?) 필요성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의 여러 조항들 중에서, 피케티가 높은 퇴보세 이외에는 승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는 '격차’의 확대를 막기 위해 80%의 진보세로 약탈하자는, 국제적 연대로 전 세계 정부들의 힘을 모아 관철하자는, 사람들의 질투심을 악용한 겨우 한 가지 선동만 하고 있다. (물론 피케티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던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도 지지율이 떨어지자, 우선회하면서 피케티의 주장을 폐기하고 만다. 이처럼 피케티의 주장은 자기네 나라에서도 채 2년도 못되어 이미 폐기되고 만 이론이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에서 피케티에 이르기까지 좌파 학자들의 시장경제 비판의 주된 초점은 '자본’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이 근거 없이 노동가치를 몽땅 차지하고, 또 자본이 자기증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별명을 붙였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했다.

   
▲ ▲ 마르크스에서 피케티에 이르기까지 좌파 학자들의 시장경제 비판의 주된 초점은 '자본’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이 근거 없이 노동가치를 몽땅 차지하고, 또 자본이 자기증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별명을 붙였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했다.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이들도 토지 노동 자본 중 자본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에 자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주의에 가장 강력하고도 일관성 있게 반대했던 위대한 경제학자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조차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규정이 가진 위험을 경고하였지만, 동시에 자본축적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시장경제의 별칭으로 자본주의라는 말을 겸용해서 쓰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과연 시장경제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 자본주의 외에는 없는가? 필자는 시장경제의 본질을 살펴보면 답을 구할 수 있다고 본다. 기업가는 자본을 가지고 시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봉사주의(servicism-필자의 신조어임!)란 말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업가는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뿐이다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소비자가 왕이다. 강매하지 않는 한,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선택되지 않은 상품은 실현되지 않은 과잉 상품이 된다. 따라서 생산자는 시장에서 보이는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여러 생산자 사이에서 소비자들을 둘러싼 충성봉사경쟁을 전개한다. 이러한 관계가 현실이기에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주권자가 시민이고, 시장에서의 주권자가 소비자란 점에서, 이것을 소비자민주주의(consumer democracy)라고도 부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소비자는 보호자 후원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비자, 생산자를 영어로 consumer, producer라고도 부르지만, 역사적으로 로마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patron, client라는 단어가 서로간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과거 노예제 로마에서는 보호자를 파트로누스(patronus)라고 했고, 피보호자를 클리엔테스(clientes)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해방노예가 탄생되게 되었다. 해방노예 출신의 자유인 클리엔테스는 다수의 파트로누스를 섬기면서 부자가 되었다.

클리엔테스가 시장에서 다수의 파트로누스를 섬김으로써 부자가 되는 과정이 또한 또 다른 자유와 해방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군정(軍政, Imperialism)이 국회(Senatus)를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화폐를 조잡하게 변조 평가절하시키거나 가격상한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판 시장경제의 파탄이 일어나자, 대의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사라지고, 장원제 혹은 농노제라고 하는 자급자족경제로 퇴보했다.) 그러나 그 용어는 여전히 살아남아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그럼으로써 가게를 후원해주는) 단골 손님을 파트론(patron)이라고 한다.

근대 시장경제는 중세 길드체제 몰래 대중을 위한 생산을 함으로써 시작이 되었다. 대다수 대중은 봉건제 하에서는 농노 등 천민이었다. 천민을 위한 대중 생산을 한 것이 산업혁명의 출발이다. 귀족들은 원래 모직옷을 입었지만, 대중들은 공장제 대중 생산 덕에 면직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귀족들은 원래 맞춤 가죽 구두를 신었지만, 대중들은 공장제 대중 생산 덕에 기성화를 신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은 천민이라는 다수의 파트론에게 봉사한 다수의 기업가를 부자로 만들었다. 천민출신의 기업가들은 농촌에서 굶어죽을 위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로 불러들여 일자리를 주었고, 마침내 봉건귀족들에 맞서 만인의 법앞의 평등과 정치적 민주주의도 이룩했다.

대한민국에서의 산업화와 번영도 기업가들이 시장을 위한 생산을 함으로써 이룩된 것이다. 특히 수출중심 가공무역의 자유무역화를 통하여 글로벌 시장의 선진국 시민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거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많은 선진 문물들도 수입할 수 있었고, 생활수준은 물론 국부도 증진시킬 수 있었다.

이때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기업가들이 흔히 회사의 표어를 “산업보국(産業報國)”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만 보아도 기업가들이 산업을 통해서 나라에 보답하고 시장 소비자에게 봉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업가 생산자들은 항상 시장 소비자들을 위한 생산을 해왔으며, 의식하건 안하건 간에 기본적으로 소비자에 대한 봉사를 자신의 사명 혹은 존재조건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간단히 훑어보기만 해도 기업가는 시장에서 주인 노릇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봉사자로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에서 변화의 원동력인 기업가의 활동은 시장에 대한 충성봉사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흔히 시장점유율(Market Share)이란 군사적 은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군사적 점령에 대한 상상을 떠오르게 만든다. 재벌이란 말, 기업가를 왕으로 비유하는 말도 군사적 은유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시장경제를 견결하게 옹호하고, 사회주의와 국가간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던 경제학자인 미제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초콜릿 왕’은 소비자, 단골손님에 대한 지배력이 없다. 그는 소비자들에게 최고 품질의 초콜릿을 가장 싼 가격에 제공한다. 소비자들을 통치하지 않고 그들에게 봉사한다. 소비자들은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는 것을 자유로이 중단할 수 있다.

만약 소비자들이 다른 데서 지출하기를 선호하면, '초콜릿 왕’은 그의 '왕국’을 상실한다. 그는 그의 노동자들을 '지배’하지도 못한다. 그는 소비자들이 생산물을 구매함으로써 그에게 되돌려 줄 태세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액수만큼, 노동자들에게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서비스를 고용하기 때문이다.” (Mises, ≪인간행동(Human Action)≫, 민경국 박종운 공역, 지만지, pp.547-548)

이러한 미제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업가를 정치군사적으로 비유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초콜릿 왕은 소비자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시장점유율이란 무시무시한 말도 시장선택율 혹은 소비자 선택율이란 말로 바꾸어 불러야 할 것이고, 지배라는 말도 봉사라는 말로 바꾸어 써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의 이러한 원동력을 중시한다면, 별칭도 봉사주의(servicism)란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시장경제에 대한 오해를 근절하는 좋은 용어법일 것이다.

기업가의 충성봉사 기획이 자본보다 우선한다

인식론 실천론적으로 볼 때, 인간의 행동은 사고가 실천에 우선한다.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목적의 실현을 위한 인과관계에 대한 (나름의) 의식이 있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다.

기업가는 시장에서 소비자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소비자의 불편을 해소해줄 그 목적에 맞는 수단들을 찾는다. 그것의 실현은 단순히 좋은 것(goods, 재화)의 이동을 통해서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의 조합 및 제조를 통해서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의 발명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기업가의 행동은 이처럼 소비자에게 충성봉사하기 위해서 실현가능한 자원들을 동원한다.

과거에는 리카도의 잘못된 주장에 따라서 지주 노동자 자본가가 토지 노동 자본을 사용하여 각각의 집합(class, 계급)이 지대 임금 이윤이라는 소득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경제학의 정설이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가치설을 일관되게 적용하여 지주와 자본가의 소득을 불로소득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리카도 경제학, 그리고 속류 리카도 경제학인 마르크스의 불로소득론은 극복되었다. 아직도 통상적으로 토지 노동 자본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대경제학에서는 기업가와 자본가를 분리하여, 기업가가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획(project)으로 자본을 빌려서 자본재를 동원하는 것을 시장경제의 진면목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미제스는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서비스를 팔려는 생각으로 학습과정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시장에서 정하는 가격에서 이윤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는 기업가적이라고 보고 있다. 자본가도 지주도, 단순히 이자나 지대를 받는 것 이상으로, 기업가의 시장봉사 기획에 동참하여 그에 투자를 하여 이윤을 얻으려고 할 때는, 기능적으로는 기업가와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중시하게 된 현대 경제학에서는 기업가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빌려서 쓰는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자본이 그 자체로 증식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기업가의 기능적인 역할(functional role)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기업가의 시장 소비자에 대한 충성봉사 기획이 원동력이고, 자본은 은행 대출이나 회사지분(주식) 모집의 형태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확하게 자리매김되었다.

이러한 인식변화를 감안해보면 시장경제를 자본주의(Capitalism)란 별칭으로 계속해서 부르는 것은 기업가적 기능에 대해서 눈을 감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란 말은 마치 자본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증식하는 것인 양 자본을 물신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본은 종(從)인 것이지, 주(主)는 아니다. Capitalism을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자본종의(資本從義)라고 하는 것이 실상에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현실 시장에서 기업 내지 기업집단들의 명멸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자본이라는 물신적 요소보다는 인간적 요소, 기업가적 요소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잘 알 수 있다. 화신백화점이 사라지고, 조흥은행이 사라지고, 쌍용그룹이 사라지고, 또 세계적으로도 필름 1위 기업 코닥이 사라지고, 휴대폰 1위 기업 노키아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한번 대기업은 영원한 대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영원히 은수저를 물고 살 수 없었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기업가의 지위에서 내려왔고, 그가 관리하고 있는 재산조차도 타인에게 넘어갔다. 그야말로 소유권이라는 이름의 그 관리권조차도 임시적인 것이었다.

'자본수익율 > 경제성장율’ 공식에 따라, 재산이나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그 격차를 늘리지도 못했다. 오직 시장 소비자의 필요에 잘 봉사하고 그 필요를 잘 충족시키는 사람만이 재산도 증식시킬 수 있고, 기업가라는 '지위’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인적 요소, 기업가적 요소였다.

따라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말로 시장경제의 별칭을 선택한다면, 이제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적 냄새가 물씬 나는 '봉사주의’라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