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아이콘..."국가경쟁력이 곧 기업경쟁력" 주창

공무원 10분의 1 감축, 민영화가 살길이다

   
▲ 이의춘 미디어펜 발행인
최회장은 95년 3번째 전경련회장 취임날 대기업규제정책에 대해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혹독한 설화(舌禍)를 겪었다. 김영삼정부가 소유분산을 통해 경제력집중을 억제하고, 문어발 경영의 사령탑인 비서실 및 기획조정실을 해체하는 것을 포함한 경제개혁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최회장은 문어발이니 업종전문화정책은 무한경쟁과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지금은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에 대비해 기업경쟁력과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회장의 이같은 쓴소리는 작은 정부에 대한 강한 소신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환경을 만들어 주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시콜콜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 문제로 기업에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산업정책에 대해 일일이 규제를 가하는 것은 기업경쟁력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자유와 창의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것이라고 봤다.

청와대는 난리법석을 피웠다. 한리헌 경제수석은 감히 재계가 정부정책에 대든다며 흥분했다. 청와대와 재경부 공정위 국세청은 재벌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데 암묵적인 공조를 취했다. 국세청은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내부거래조사의 칼을 들이댔다.

시장경제는 자유기업 경제

최회장은 철저한 시장경제 주창자였다. 50년대 시장경제의 메카 시카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시장경제 신봉자가 됐다. 인간자본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와 동문수학했다. 시카고학풍에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채택해야만 세계초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장경제를 꽃피우기위해선 사유재산권 보장, 사익추구 인정, 기업과 선택의 자유, 경쟁촉진, 시장 그리고 작은정부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이것들은 ‘작은 정부, 큰시장’으로 요약된다.

작은정부야말로 초일류국가로 가는 데 필수적이라고 봤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우기 위해선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로 가기위해선 공무원수를 10분의 1로 감축해야 한다는 혁신적 발상을 했다.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소유, 운영중인 영리단체는 모두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최회장은 경제전쟁 시대 정부의 주된 기능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시장경제의 주인공은 기업과 국민이지, 결코 정부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 군림해서 안된다고 했다. 상품을 팔고 서비스를 한다는 마음자세로 일을 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경제학의 한국화에 힘쓰다>
 

최회장은 대한민국을 초일류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강한 열정을 가졌다. 1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를 달성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초일류국가 달성을 위해 98년 죽음을 눈앞에 둔 폐암말기 투병속에도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을 직접 집필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기위해선 경제학의 한국화가 시급하다고 봤다. 영미식 경제학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회장 생존시 서구 선진국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 3만달러였다. 한국이 서구를 단순히 추종하려면 영미식 경제이론과 모델을 그대로 따라해도 된다. 하지만 서구선진국보다 국민소득이 2~3배나 앞서는 초일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한국현실에 맞는 기업이론과 경제이론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경제학정립은 폴 새무엘슨 MIT대 교수의 <경제학> 비판에서 출발했다.

첫째 영미 경제학은 인간의 마음을 도외시하는 게 결함이다. 둘째 미국 경제학은 내수중시형 경제학이다. 한국은 주력산업이 대부분 수출산업이다. 미국기업 국제경쟁력은 세계1등으로 기업과 산업, 국가경제의 성장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무엘슨 경제학은 성장과 국제수지보다는 인플레와 실업 등 경제안정을 중시했다.

둘째 미국경제는 무역적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무역적자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다. 달러를 무한정 찍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은 무역수지가 중요하다. 최회장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대규모 무역적자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셋째 미국경제학은 정부의 실패보다는 시장의 실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새무엘슨류의 미국경제학은 시장에는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네째 미국경제학은 수학논리를 과신한다. 수학을 통해서는 인간의 경제행위의 양적인 면, 도식화한 것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여섯째 미국경제학은 중시(中視)경제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미는 국가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매크로(거시)경제학과 개인과 기업을 다루는 마이크로(미시)경제학의 둘로 나눌 뿐이다. 한국은 일본 독일처럼 국가와 기업사이에 기업그룹이 존재하는 점이 다르다. 영미경제학에 물든 학자들은 재벌과 기업그룹을 해체의 대상으로만 본다.
 

IMF가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고금리정책과 재정긴축을 요구한 것은 매우 잘못된 정책이었다. 최회장은 시카고스쿨의 통화주의자들이 남미국가(칠레제외)들을 망쳐놓았다고 비판했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국가경쟁력강화 제창>

최회장은 92년부터 글로벌리제이션을 언급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란 말은 지금은 일상적인 용어가 됐다. 당시엔 무척 생소한 단어였다. 그는 국내 인사 가운데 세계화시대의 도래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김영삼대통령이 수년후인 96년 해외순방도중 향후 국정과제로 세계화를 제시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도래를 강조한 것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 국가경제가 성장하기위해선 민간주도의 시장경제체체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봤다.

최회장은 93년 전경련 상의 무협 경총 기협중앙회 등 경제5단체가 참여하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기업경쟁력 대신 국가경쟁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세계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기업만이 아닌 국가경쟁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고비용저효율 병폐로 인해 기업 경쟁력이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혁신과 기업가정신의 아이콘>

최회장은 그룹경영에서 10년, 20년, 30년앞을 내다보는 경영을 했다. 임직원들에게 항상 “10년뒤에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봤습니까?”를 질문했다. 앞을 내다보고 장기경영을 하는 데 세가지 원칙을 지켰다.

첫째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해야 한다. 둘째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셋째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최회장이 삼성과 LG가 선점한 전자 가전사업에 뛰어들지 않은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대신 남들이 하지 않던 정보통신사업에 한발 먼저 진출해 주도권을 잡았다.

SK그룹 성장사는 혁신과 도전의 역사였다. 국내 최초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60년대 경쟁사들이 직물생산에 안주하고 있을 때, 폴리에스테르원사공장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원사공장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었다. 당시로선 무모하고 불가능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만 생산하던 폴리에스터필름 국산화에 나선 것도 혁신과 도전정신의 발로였다.

80년대 유공을 인수한 것도 10년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최회장은 그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과 끈끈한 인맥을 쌓아 정유산업 진출에 대비했다. SK는 유공인수로 섬유 원사업체에서 종합에너지및 화학기업으로 도약했다.
 

94년 한국이동통신업을 인수하면서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을 주도한 것도 10년앞을 내다본 치밀한 준비가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미디어펜=이의춘 발행인 jungleelee@naver.com]

 

<최종현 라이프 스토리>
1. 미래 먹거리 고민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 경영인

최회장은 한국이통을 시가의 몇배인 4200억원을 주고 인수했다. 정보통신이 미래 주력산업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선점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추후에는 5000억원을 더주고도 인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설립, 유공인수, 한국이통 인수 등은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한 것이었다.

최회장이 타계하기 전인 97년 그룹매출은 45조원으로 재계5위였다. 98년 8월 최회장이 운명하면서 장남 최태원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최태원회장은 에너지화학및 정보통신을 핵심축으로 하면서도 사업다각화에도 적극 나섰다. 2012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수성(守成)에도 성공했다. 2014년 그룹 매출은 142조원으로 삼성 현대차에 이어 재계3위를 차지하고 있다.

2. 국가경쟁력 강화에 열정 쏟은 재계총리

최회장은 단순 사업가라기보다는 보기드믄 경세가였다. SK그룹의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는 동안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해 열정을 쏟았다. 자신의 소신발언으로 인해 SK그룹이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을 세계1등 국가로 만들기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데 힘썼다.

그는 평생 3가지 꿈을 간직했다. 첫째 대한민국 국민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하는 심신수련법 연구 둘째 우리 기업들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만드는 경영이론 개발, 셋째 우리나라를 21세기에 한국을 1인당 소득수준 6만달러이상의 초일류 선진국으로 만드는 한국적 경제학의 정립 등...

그는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그만하고, 사업에나 신경쓰라는 부인 고 박계희여사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경제를 위해서라면 내 사업이 타격을 입더라도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죽기직전까지 육필 원고를 썼다. 말기 폐암투병을 하느라 산소호흡기를 맨채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을 직접 집필했다. 이 땅의 척박한 기업풍토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경제와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타계직전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찾아간 것은 ‘재계총리’로서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왔다. 공자가 성인과 충신의 사례로 든 견위수명(見危授命)에 해당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땐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이 성인이요, 충신이라고 했다.

3.전두환 신군부도 못한 원유도입을 해결하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사우디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유공급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동자부장관은 몇 번이나 사우디로 날아가 당시 야마니 석유상을 만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석유공급이 끊길 국가적 위기였다.

신군부가 마침내 최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우디정부를 움직여 하루 5만배럴씩 공급받는 데 성공했다. 사우디는 다른 나라로 가기로 한 원유를 우리나라로 돌리기로 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정부도 못한 일을 최회장이 사우디왕가와의 탄탄한 인맥을 활용해 성사시킨 것이다.

SK가 유공을 인수한데는 원유도입 능력과 사우디와의 탄탄한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유공은 이후 SK에너지로 상호를 바꾸고 한국을 대표하는 에너지업체로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