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5000억~6000억원에 매각해 자본 확충 계획
서울시, 2000억원 미만에 매입 원해 차질 불가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안 팔리면 가지고 있겠다"
항공업계 "서울시가 헐값에 내놓으라고 강짜 부려"
   
▲ 대한항공 보잉 747-8i 여객기 /사진=대한항공


[미디어펜=박규빈 기자] 서울시가 대한항공 소유 호텔 유휴 부지를 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유동성 확충에 나서야 하는 대한항공이 부심하는 모양새다. 경영난에 빠진 대한항공은 올해 안으로 최소 5000억원에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를 매각하는 자구안을 마련해 진행 중이나, 서울시가 공원 조성을 적극 밀어붙이며 부지 매각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사진=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28일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이날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의 장인 고(故) 김봉환 전 국회의원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나왔다.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종로구 송현동 호텔 부지 매수자는 정해진 게 없다"는 취지로 "땅이 팔리지 않을 경우 가지고 있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조 회장의 이 같은 발언은 서울시 당국의 발표 내용에 바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나, 호텔 부지를 헐값에 파는 '손해나는 장사'에는 분명한 반대 의사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한진그룹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제반 조건에 맞는 적당한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부지 매각이 어려울 것이라는 원론적인 의미"라고 일축했다. 논란이 번져나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 서울특별시 로고./사진=서울특별시

이날 대한항공의 자구안 중 하나인 송현동 부지 매각이 재계의 관심사로 재차 부상한 이유는 서울시가 해당 부지를 매입해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공표한 데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 서울시는 지난 27일 개최된 도시·건축공동위원회에서 북촌 지구단위계획 내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된 송현동 부지를 문화공원으로 용도변경하는 내용을 담은 결정안 자문을 상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6월 중 열람공고 등 관련 절차를 추진해 올해 내로 부지를 문화공원으로 지정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지 소유권자인 대한항공이 글로벌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현금이 말라 경영난에 처했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는 한국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채권단을 통해 대한항공에 1조2000억원을 지원하며 내년 말까지 2조원 규모의 자본 확충을 요구했다. 이에 화답하듯 대한항공은 1조원 수준의 유상증자를 추진키로 했고, 자구 노력의 일환으로 유휴 자산 매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를 열고 송현동 부지와 왕산마리나 운영사인 왕산레저개발 지분 등 자산 매각을 의결해 추진 중인 것이다.

대한항공은 지난달 매각 주관사로 삼정KPMG·삼성증권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현동 49-1번지 소재 대한항공 소유 호텔 부지./캡쳐=네이버 지도

한편 구 주한미국대사관 직원숙소가 있던 경복궁 옆 3만6642㎡의 송현동 부지는 2002년 6월 부지의 소유권이 국방부에서 삼성생명으로 넘어갔고, 이후 삼성생명은 2008년 대한항공에 2900억원에 매각했다. 대한항공은 이를 호텔 포함 복합문화단지로 탈바꿈 하고자 했으나 서울특별시교육청의 학습권 침해 논리 등 관련법에 가로막혀 물거품이 됐다.

서울 도심 노른자땅이 근 20년 방치된 셈이다. 현재 부지의 가치는 5000억∼6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게 부동산 업계 전언이다.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부지 매입자를 찾아 자금을 확보해야 하나, 서울시가 매입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비치고 있지만 공원 조성안을 상정해 땅값 낮추기 작전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고 있다.

관가에 따르면 서울시는 부지 매입가를 2000억원 미만으로 책정하고 있고, 매입 대금 지급도 거래 시점이 아닌 자체 감정 평가와 예산 확보 등을 거쳐 2년 가량 후를 예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땅을 12년 전 2900억원에 산 대한항공 입장으로선 취득 원가보다 낮게 팔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해 쉬이 납득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사진=연합뉴스


진희선 서울시 행정제2부시장은 "대한항공이 이 땅을 제3자에게 팔 경우 이를 재매입해서라도 공원으로 만들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인·허가권을 쥔 서울시는 지난 3월 역시 대한항공에 "민간 매각시 발생하는 개발 요구를 허용할 의사가 없다"며 공매 절차를 중단하라고 통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 측은 당시에도 유휴자산 매각은 이사회 의결 절차가 필요한 사안인만큼, 적정가를 받지 못하면 경영진이 배임죄에 저촉될 수 있다는 입장을 서울시에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시 안대로 송현동 부지를 도시계획 시설상 문화공원으로 지정하면 민간이 이 땅을 매입해도 다른 개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워진다. 공원 부지 지정이 '땅값 미리 낮추기' 아니냐는 합리적이고도 강한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유다. 

이 같은 사정 탓에 대한항공이 서울시와의 수의계약이 아닌 당초 계획대로 공개경쟁 입찰을 진행한다 쳐도 과연 누가 개발이 불허될 공원 지정을 앞둔 부지를 최소 5000억원을 주고 사들일지도 의문이라는 게 재계 중론이다. 따라서 송현동 부지 인수 의지를 내비치던 기업들도 입찰 참여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서울시가 강짜를 부리고 있어 대한항공이 송현동 부지를 제값 받고 팔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며 "경영난에 처해 뭐든 돈이 되는 것은 다 팔아야 하는 대한항공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서울시가 자구안에 재를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반값 이하에 후려치려는 서울시는 깡패 수준"이라며 "관치경제의 표본"이라고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이에 현금줄이 말라가는 대한항공은 초조한 모습이다. 만일 송현동 부지 매각 대금을 계획대로 얻어내지 못한다면 한진그룹 차원에서의 추가 자구안 마련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항공업계 관계자는 "채권단은 자금을 서둘러 마련하라고 압박하고, 서울시는 헐값에 내놓으라고 하는 형국"이라며 "대한항공은 추가 자금 확보가 여의치 않아 기내식·항공정비(MRO) 사업부 매각까지 염두에 둬야 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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