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50주년①] "고속도로 전, 한국경제 단절 지역 불과"
박정희 재단 이사장 "전국을 하나로 통합해 규모의 경제 실현한 것"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다. 경부고속도로 없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하겠다는 결단이 없었다면, 하더라도 다른 나라들 했듯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 오늘날 한국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 본다."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지난 1일 추풍령 준공기념탑에서 재단이 주최한 경부고속도로 50주년 기념식을 갖고 모두발언에서 이같이 말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이날 기념식 후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 "한국경제는 경부고속도로 이전에는 파편화된, 단절된 지역경제에 불과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이를 하나의 통합된 경제로 만들었다"며 "대규모의 생산시설이 존립하는,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조건을 마련했다. 부산(경부고속도로)과 인천(경인고속도로)을 잇기도 해서 빠른 속도로 기업이 물건을 항구로 수송하여 해외로 수출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좌 이사장은 "(경부고속도로는) 농촌을 일으켜세우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근대화, 민족 중흥 역사의 진정한 시발점이자 대한민국에 산업혁명을 가져온 원동력이 됐다"며 "1970년에서 77년까지 대한민국 수출이 10배 늘었는데 인류 역사상 이런 기록은 없다. 이건 경부고속도로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7월 1일 추풍령 준공기념탑 앞에서 경부고속도로 50주년 기념식을 갖고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고속도로 준공 과정에 대해서도 그는 "건설과정을 자세히 보면 2년 5개월 정도 걸려서 했는데, 세계 역사에서 가장 빠른 준공 속도로 알고 있다. 당시 일본이 동경-나고야간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7년 걸렸다"며 "1km당 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는데 일본에 비하면 비용대비 1/7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이는 싸우면서 건설하자와 꼭 같은 원리"라고 언급했다.

좌 이사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이 당시 많았고 남한이 북한을 막아서 견딜 방안이 녹록치 않았다. 박정희 입장에선 경제를 일으킬 시간이 촉박했던 것"이라며 "고속도로 건설을 최대한 빨리 만드는게 급선무였다"고 말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분위기를 묻자 좌 이사장은 "국민들 대부분은 무관심했다. 당시 대학생 2학년이었던 나조차도 박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하자 '왜 돈을 그런데 쓰냐'며 이해하지 못했다"며 "내가 다니던 서울대 경제학부도 그렇고 고속도로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 당시 들은 적 없었고 당시 이를 경제학계에서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일각에서 '고속도로 보수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비판은 말이 안된다"며 "길은 우선 뚫어놓고 미흡하면 고쳐나가는 것이다. 이걸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완공에 10년 걸리면 물류 차단은 물론이고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만들어놓고 쓰면서 문제가 생기면 고쳐나간다는 게 얼마나 실용적인 발상이냐"고 반문했다.

다만 그는 이날 "정부가 새로 만든 경부고속도로 50주년 기념 헌정 비문에 박정희라고 하는 이름 세 글자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웅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 경부고속도로(서울-부산간)는 1968년 2월 1일 기공해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당시 폭 22.4m(4차선) 총연장 428km로 완공됐고 연인원 890만명, 연장비 165만대, 공사비 429억 7300만원을 쏟아부은 대역사였다./사진=미디어펜
당시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고속도로 건설에 착안을 얻은게 맞냐고 묻자, 좌 이사장은 "서독에 갔을 때 아우토반(고속도로)를 봤다고 하지만 서독에 가기 전에 제주 516 도로를 먼저 했었다"며 "당시 제주도에 우마차도 다니지 못했던 길을 도로로 확장했다. 도로에 대한 개념이 탁월했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1960년대 수출을 위해 애썼지만 수송 문제에 부딪힌걸 피부로 느꼈던 박정희는 서독에 가서 처음 배웠다기 보다는 '고속도로의 효과를 확인했다'고 표현하는게 맞다"며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1년 전인 1967년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해 1969년 이를 먼저 개통했고 도로망이 경제개발에 결정적인 인프라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공병대 등 군인력과 장비를 투입한 것에 대해 좌 이사장은 "그 당시 우리나라 민간 건설업자는 시공 역량이 떨어졌다"며 "모든 시설과 장비를 국군 공병대가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 다 동원했다. 봉급은 군대 급여로 주고 그래서 공사비가 낮았다"고 설명했다.

좌 이사장은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박 대통령의 종합적인 시각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하면서 새마을운동을 같이 했다. 결국 농촌의 특용작물이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많이 팔려나가기 시작하고 농촌 소득이 도시보다 더 높아질 정도였다"며 "박 대통령이 '내가 왕복 16차선으로 만들고 싶은데 야당 대표들이 너무 반대해서 일단 4차선으로 만들겠다'고 말한 것도 총체적으로 경제와 물류 전체를 보는 시각과 미래를 내다본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