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였던 박원순, 아름다운 양보로 정계 입문
최초의 3선 서울시장 찍고 대권 가는 길에서 삶 마감
[미디어펜=조성완 기자]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그리고 서울시장으로 정계에 진출한 이후 대권주자에 오르기까지 박원순 서울시장의 삶은 다양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삶이 극단적 비극적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하지만 유신체제 반대 시위 참여, 고(故) 김상진 열사 추모식 참석 등으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명령 9호 위반으로 구속 됐다. 

서울대에서 제명된 그는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 수료와 함께 검사로 임명됐다. 하지만 사형 집행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이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기념촬영한 모습./사진=연합뉴스

이후 '인권변호사의 전설'인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면서 정계 입문 전부터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지내면서 사법개혁운동, 소액주주운동 등 굵직한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기부 받은 물건을 다시 가공해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팔고 그 수익을 기부하는 아름다운재단·아름다운가게 등의 시민단체를 설립하면서 국내 기부문화 확산을 주도했다.

박 시장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인 것은 지난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한나라동 소속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치르게 된 보궐선거에서 박 시장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의 지지율은 5%가량에 불과했지만 선풍적 인기를 끈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출마 포기와 함께 지지 선언을 하면서 지지율이 급등했다.

   
▲ 지난 2011년 8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한 식당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당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 대학원장 모습./사진=연합뉴스

백두대간 종주 직후 덥수룩한 수염 차림으로 등장한 박 시장, 그를 끌어안으며 지지 의사를 밝힌 안 대표. 이 장면은 ‘아름다운 양보’로 평가 받으면서 결국 지지율 5%였던 무소속 후보를 서울시장 당선으로 이끌게 된다.

2012년 민주통합당에 입당한 박 시장은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를 63만여표 차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당내 대권주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당내 기반이 약하다는 약점이 늘 따라 붙었고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박 시장은 2018년 6‧14 지방선거에서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를 제치고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 됐다. 올해 4‧15 총선에서는 기동민, 박홍근 의원을 필두로 이른바 ‘박원순계’로 불리는 의원 10여명을 당선시키면서 차기 대권을 향한 당내 기반도 마련했다.

그는 지난 6일 민선7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켜 왔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인 8일 전직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0일 새벽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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