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시 철회’ 협상 조건으로 제시 대화 자체의 문턱 높여
트럼프행정부뿐 아니라 다음 행정부 겨냥 중대조치 촉구
비핵화 협상 백지 상태 돌리고 남한정부 중재 거부 읽혀
[미디어펜=김소정 기자]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오랜만에 담화를 냈다. 지난달 초 서슬 퍼렇게 대남 비방을 하던 모습에서 냉정한 정세 분석가로 변모한 모습이다. 

김 제1부부장 본인은 올해 안 북미정상회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대선을 앞둔 미국을 향해 정치적인 계산으로 협상에 나서지도, 또 위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작년 말 자신들이 예고한 소위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직 없는 이유는 정상간 친분관계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앞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방한했을 당시 최선희 제1부상이 냈던 담화 내용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용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보여주기 식 북미정상회담에는 선을 그은 것이다. 특히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북미대화 재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또한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친분관계를 재확인하면서 “하지만 또 모를 일이기도 하다. 두 수뇌(정상)의 판단과 결심에 따라 어떤 일이 돌연 일어날지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제1부부장은 이번 담화에서 “이제는 ‘적대시 철회 대 조미 협상 재개’가 새로운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즉, 앞으로 미국과 진행할 협상 테이블에 그냥 마주앉을 일은 없을 것이고, 적대시 철회가 우선되어야 한다며 대화의 문턱을 한층 높인 것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도 북한과 다시 마주앉으려면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나와야 한다고 재확인한 것이다. 

김여정 담화의 첫번째 포인트는 트럼프행정부와 이어갈 협상은 물론 현 행정부를 넘어서 누가 됐든 차기 행정부까지 겨냥한 협상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비건 대표가 한국에 와서 최선희 1부상을 향해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면서 북으로 넘긴 공을 김여정 제1부부장이 다시 받아쳐 넘긴 셈이다. 

다음 김여정 담화의 두번째 포인트는 비핵화 조건의 제시이다. 이 역시 트럼프행정부의 추가 협상은 물론 다음 행정부에도 적용되는 조건이다. 김 제1부부장은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행동과 병행해 타방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조치들이 동시에 취해져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강조했다.

   
▲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연합뉴스

김 제1부부장의 담화는 A4지 4쪽 분량으로 꽤 장문으로 작성됐다. 게다가 미 행정부의 북한을 향한 시각을 분석한 내용과 북한이 느끼고 있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나열했다. 자신들이 협상 의제를 바꾸게 된 계기도 상세하게 설명하며 자신들은 트럼프행정부뿐 아니라 다음 정권, 나아가 미국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고 썼다.

지난해 2월 말 하노이회담 때 협상 테이블에 올렸던 일부 대북제재 완화 의제와 관련해서는 “김 위원장이 인민생활 향상을 도모해보려고 일대 모험을 했다”고 설명했다. 또 6월30일 판문점 회동 이후 의제가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김 위원장은 “화려한 변신과 급속한 경제번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제도와 인민의 안전과 미래를 담보도 없는 제재해제 따위와 결코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 대통령에게 천명했다”며 상세하게 밝혔다.

그러면서 김 제1부부장은 이번에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편하게 흘러갈 것이다”라고 말해 무력 도발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러면서 “우리 핵을 빼앗는데 머리를 굴리지 말고 우리 핵이 위협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로 머리를 굴러보는 것이 더 쉽고 유익할 것”이라는 제안도 빼놓지 않았다. 바로 핵보유국 선언을 강조한 것으로 더이상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지난 합의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여정 담화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북미대화 재개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도가 읽혀진다”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북한은 결국 장기적인 대응 능력을 제고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단기적인 소모전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비핵화 조건으로 미국의 동시적 불가역적인 중대조치를 제시한 것도 장기적 대응 의도를 재확인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정대진 아주대 교수는 “북한이 한미연합훈련 중지, 종전선언, 평화협정 논의, 주한미군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적대시 철회를 하면 북미대화나마 재개할 수 있다고 협상의 문턱을 높여서 미국에게 받은 공을 되돌려주고 있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미국이 여기에 응할 수 있는 상황이나 여건이 되는지 의문스럽다는 점에서 당분간 공방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북한은 계속 밝혀온 바대로 자신들의 전략적 계산표 하에 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을 밝히는 동시에 김정은 위원장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인사를 전하며 정상간 마지막 여지는 남겨두는 등 다방면으로 현상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중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제1부부장은 이번 담화의 마지막에 “최근 미국 독립기념일 DVD를 얻으려한다”며 김 위원장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대선 성공 기원 인사를 포함시켰다. 그러면서도 남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북한은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더 이상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은 필요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남한에 대해 특별한 비난도 없어 한국도 자신들의 요구에 맞게 역할을 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