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문, 함왕(咸王)이 살던 이끼계곡과 아담한 절집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양평의 진산 용문산(龍門山)은 높이 1157m,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에 이어 4번째로 높고, 험준한 바위산이다.

예로부터 산세가 험하고 웅장하면서 아름다워, ‘경기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였다.

   
▲ 양평 용문산 사나사 계곡 [사진=미디어펜]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했다고 해서, 용문산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또 미지는 미리의 완성형이며, 미리는 용의 새끼라고 한다. 따라서 미지산이나 용문산이나, 그 뜻에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용문산 남쪽 산록 계곡에는 용문사, 상원사, 윤필사, 사나사 등 고찰들이 있다. 죽장암, 보리사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도 없다.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진 용문산 대표 사찰 용문사(龍門寺)는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유명하다. 또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 2기가 있다.

사나사(舍那寺)는 옥천면 용문산 기슭에 있는, 고려 초기 승려 대경이 제자 융천 등과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다.

1367(공민왕 16)에 보우가 중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698(숙종 24)에 덕조가 소규모로 재건했다. 다시 1907년에는 의병과 일본군의 충돌로 인해 완전 소실됐다가, 1909년과 19372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전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 극락전.산신각.함씨각.대방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정도전(鄭道傳)이 글을 짓고 의문이 글씨를 써서 1386(우왕 12)에 세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원증국사석종비, 고려 중기에 세운 높이 2.7m의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용천리 삼층석탑이 있다.

특히 구한말 의병들이 일제와 전투를 벌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顯忠施設)이기도 하다.

양평의병(楊平義兵)은 이 곳 사나사를 중심으로 용문사, 상원사를 근거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19071027일 일본군 보명 제13사단 제51연대 11중대로 습격해왔다.

격전의 현장이 된 사나사는 당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렸는데, 복원된 대적광전 옆에 이런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무엇보다 사나사는 바로 옆 계곡이 백미다.

이 계곡은 사나사를 지나 함왕봉, 장군봉을 거쳐 용문산 정상인 가섭봉(迦葉峰), 혹은 백운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옆으로 흘러내린다. 바로 함왕골이다.

수량이 사계절 내내 풍부하고, 한 여름에도 발을 담그면 금방 시릴 정도로 찬 계곡물이 옥처럼 맑다. 곳곳의 바위들이 시퍼런 이끼에 뒤덮여 있는 원시계곡(原始溪谷)이다.

   
▲ 함왕골 이끼계곡 [사진=미디어펜]

장맛비가 넉넉하게 내린 다음 날, 이 수려한 비밀의 정원을 찾아 나섰다.

수도권전철 경의중앙선(京義中央線) 양평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길 건너 왼쪽으로 농협이 보인다. 그 앞에 사나사 가는 버스가 있다. 20분 정도 걸린다. 버스를 오래 기다리기 힘들다면, 역 앞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사나사까지 정액요금 1만원이다.

용천리 마을회관 앞이나, 절 입구 공영주차장에서 내린다. 용천리(龍川里)는 조선왕조실록 1426(세종 6)에 지명이 나오며, 용문산과 사천의 두 지명을 합쳐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사나사 가는 길에 들어서자마자, 맑고 넘치는 수량의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고, 더위를 식히는 피서객들로 붐빈다.

계곡을 끼고 용문산 품에 안겨 조금 올라가다보면, 우측에 함왕혈(咸王穴)이란 샘이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런 전설이 쓰여 있다.

옛날 용문산에 함씨족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하늘에 일곱 색깔 무지개가 뜨고, 이 곳 샘 주변에 학과 까치, 사슴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 때 샘에서 튼튼하고 총명한 눈동자의 옥동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함씨족들은 이 옥동자를 왕으로 추대, 나라를 이루고 함왕성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금 위쪽에 실제 함왕성터(咸王城址)가 있다.

안내판에는 없는 얘기지만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비교해보면, 함왕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호족세력인 함규(咸規) 장군을 말하는 것으로, 향토사가들은 추정한다.

함규는 함왕성의 성주였다. 나말여초(羅末麗初) 당시 그는 양평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호족으로, 견훤과 궁예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경계지역의 지배자였는데, 실리와 때를 기다려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귀의한다.

함규와 함씨 세력이 웅거하던 곳이 함공성(咸公城), 또는 함씨대왕성이라 한다. 함공성은 당시 29058척이었으나, 지금은 정문과 그 좌우로 이어지는 석축만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정말 도로변에 석축 일부가 남았는데, 돌들이 바위 수준으로 거대하다.

사나사 위쪽에도 함왕산성이 있고, 함왕봉과 함왕골 등의 지명도 함씨 세력들의 유산이다.

작은 다리로 계곡을 건너, 계속 오른다. 사나사가 양평의병 전투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용문산 함왕골에서 흘러내리는 용천은 옥같이 맑고 투명하니, 곧 용의 미르내.

사나사는 지금은 작은 절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아주 큰 대찰이었고, 마을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사나사 이전에 대월사(大月寺)가 있었다고 한다.

푸른 숲 속 고즈넉한 길을 좀 더 오르니, ‘용문산 사나사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있다.

예전 승가고시가 치러지던 서울 봉은사의 일주문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는데, 키가 훤칠하게 커서 맞배지붕이 더욱 견고해 보인다. 뒤편 처마 밑에는 부서진 제비집이 눈길을 끈다.

일주문을 지나 산중에선 보기 드문 평평하고 넓은 분지를 지나면, 왼쪽으로 절집들이 모여 있다. 아담하고 조촐한데다 한적하다.

정면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는데, 협시불인 노사나불 불사 권선문이 절 입구에 붙어 있다. 그 뒤로 가파르게 치솟은 용문산봉이 마치 부처의 광배(光背) 같다.

왼쪽 위에 있는 이미타불을 모신 극락전(極樂殿)은 대적광전보다 훨씬 소박하다.

대적광전 앞 오른쪽 아래엔, 절 규모에 어울리는 2.7m 높이의 예쁘장한 용천리 삼층석탑, 원증국사 석종부도탑 및 석종비가 있다. 특히 군데군데 깨지고 파손된 석종비가 안쓰럽다.

그 밑에 서 있는 석조미륵여래입상은 넉넉한 미소를 지녔다.

대적광전 우측 양 옆에 산신각과 함씨각(咸氏閣)도 있다. 함씨각은 다른 절에는 없는 것이다.

이 절에 함씨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나사는 함규의 원찰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정도 있다. 함규가 고려의 개국공신이었고, 사나사는 건국 초기인 923(태조 6)에 창건됐다.

등산로 옆 나무 밑에는 식수를 담았던 대형 석조(石槽)가 있고, 달마상(達磨像)이 그 앞에 기대 앉아있다. 배불뚝이 익살스런 모습이다.

내처 산길을 오른다.

징검다리로 계곡을 넘나드는 울창한 숲길이다. 오른쪽 함왕성지 가는 길이 있지만, 정상 쪽으로 직진한다. 수풀이 우거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다.

초록싸리, 닭의장풀 등 이맘때가 한창인 여름 풀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 본다. 길옆에는 예전에 화전민(火田民)들이 살던 집터 같은 곳들이 여럿 보인다.

계곡의 바위들은 온통 푸른 이끼를 뒤집어썼다. 유명한 가리왕산(加里王山) ‘이끼계곡못지않다. 가리왕산에는 갈왕이, 용문산에는 함왕이 살았다. 용문산이 가리왕산보다 못할 게 없다.

삼거리 왼쪽에 제법 큰 폭포가 숨어있다.

이 정도 규모의 폭포면 이름이 있을 법하지만, 안내판을 찾지 못했다. 폭포 물줄기도 큰 바위 왼쪽에 가려져 있어, 왼쪽 절벽으로 바짝 다가서야 전체를 볼 수 있다. 신비감(神秘感)마저 드는 폭포 밑 푸른 물이 꽤 깊어 보인다.

발을 담그니, 금방 시려 참기 힘들다.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더위를 날려 보낸 후 하산, 양평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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