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롯데캐슬 브랜드 도입…롯데건설 위상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건설업황 최악 속에 빛난 리스크 관리
건설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차지하는 경제의 기둥이다. 건설업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마다의 성공 DNA장착한 국내 건설사들은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본보에서는 건설 성공 DNA를 일깨운 주요 현장 및 사사(社史), 오너 일가 등의 스토리를 재조명해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건설사 성공DNA⑧-롯데건설(2)]'롯데캐슬' 고급 브랜드 아파트 시대 개막

[미디어펜=홍샛별 기자]롯데건설은 1999년 2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요지에 위치한 ‘롯데캐슬 84’ 단지 분양을 통해 국내 건설업계로서는 최초로 아파트 브랜드를 도입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유럽성의 클래식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선보임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후 십수년간 서울 수도권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구, 부산, 울산, 광주, 전주, 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롯데캐슬 아파트를 공급하면서 우리나라의 주거문화 선진화에 앞장서고 있다.

◆'롯데캐슬'…성(城)에 사는 가치 선물

1999년 ‘롯데캐슬’ 브랜드 도입은 롯데건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롯데건설은 1999년 2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일은행 합숙소 부지에 짓는 아파트 단지를 통해 처음으로 ‘롯데캐슬’ 브랜드를 선보였다. 

   
▲ 롯데캐슬 84 분양 당시 광고 /사진=롯데건설


‘롯데캐슬 84’라는 이름의 해당 단지는 총 84가구 규모로 전 가구가 전용면적 208㎡ 대형으로 구성됐다.

롯데건설은 최상의 마감과 아파트 외벽 석재 마감 처리, 세대별 개별문양 제공 등으로 최고급 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 단지 전면을 화강암으로 축조하는 등 입주자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 유럽의 한 성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 

롯데건설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3.3㎡당 1000만원이 넘는 분양가를 책정했다. 이 무렵 국내 건설경기는 IMF환란으로 수많은 회사가 도산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만큼 ‘무모한 도전’이라는 우려도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호텔과 백화점을 지어본 노하우에 고급성, 편의성을 더해 마치 ‘성(城)’에 사는 것 같은 최고급 이미지가 투영된 ‘롯데캐슬’을 탄생시켰다. 

롯데캐슬 84는 1999년 2월 모델하우스를 개관하고 이어 3월 3차 동시분양에서 1순위 접수를 받았다. 

최고 분양가임에도 불구하고 100%조기 완판을 달성했다. 롯데캐슬 84는 분양 이후 1억원이 넘는 프리미엄을 형성하며 고급 브랜드 아파트 시장의 시대를 열었다. 

   
▲ 울산야음롯데캐슬 정문게이트. 2008 굿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사진=롯데건설


롯데건설은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를 고객만족으로 삼고, 경영의 모든 부문을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같은 롯데건설의 노력은 1999년 2월 대한주택공사로부터 우수시공업체로 선정되며 입증됐다. 

롯데건설은 시공능력 향상뿐 아니라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이며,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를 진행했다. 

도심 속 자연이 숨쉬는 주거공간을 위한 친화적인 설계를 해왔고, 고객의 신뢰를 얻는 데 힘썼다. 그 결과 한국표준협회가 선정하는 한국서비스대상을 2019년 기준 18년 연속 수상했다.

롯데건설은 주택뿐 아니라 플랜트 사업도 강화했다. 

2008년 플랜트 전문인력을 대규모를 채용했고, 요르단에 400MW급 가스복합화력 발전소 건설 공사를 수주했다. 

같은 해 9월 4000만 달러 규모의 LPG 저장탱크 건설 공사도 수주했다. 다양한 플랜트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요르단 전체 발전량의 15%를 차지할 대형 프로젝트인 알카트라나 발전소도 수주하였으며, 2011년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리스크 관리와 마케팅 전략, 신규 시장 개척으로 이겨 낸 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우리 건설사들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택시장 사정이 좋지 않은데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롯데건설 역시 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상시 리스크 분석 전담조직인 워룸에서는 관리사업장에 대한 등급 관리를 실시하고 신규사업에 대한 심사를 강화했다. 

롯데건설은 수주잔고 사업장들의 상황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별 추진계획을 수립한 뒤 이를 적극 반영했다. 

이러한 일련의 리스크 관리와 더불어 미분양 소진을 위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일례로, 회현동 ‘롯데캐슬아이리스’의 분양광고를 로스앤젤레스 한인 언론에 실어 해외거주 한인들에게 알렸다. 

이 같은 노력 덕에 미분양은 점차 해소됐다. 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2인 가구 소형주택, 보금자리주택, 민간임대주택, 해외실버주택 등 다양한 사업방식을 검토했다. 대부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사업화되지 않았지만, 향후 민간임대사업과 해외주택사업을 실현시키는 촉진제가 됐다. 

◆신문배달 하던 '신격호'…국가 기간산업 진출까지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잠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롯데그룹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음력)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하여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외지에서 문학도의 꿈을 불태우던 청년 신격호는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했다. 

이후 평소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 보아온 한 일본인 투자자의 출자로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 딛게 된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은 1967년 한국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한·일 통합경영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롯데그룹은 1970년대 롯데칠성 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 현대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더불어 호남석유화학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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