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 도래 예견…시장경제 존중의 나라 꿈꿔

자유경제원이 기업가연구회에서 SK그룹 고 최종현 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한국의 기업가론을 발표했다. 기업가연구회는 자유주의 학자 및 저술가 20여 명이 모여 발족한 모임이다.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기업가들의 업적을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시장경제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최종현 SK그룹 회장에 대한 연구는 이의춘 미디어펜 발행인이 맡았다. 이의춘 발행인은 발제문을 통해 “최 회장은 SK그룹 경영에 힘쓰면서 재계의 수장으로서 국가경제와 국가경쟁력 강화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미디어펜은 이의춘 발행인의 발제문을 상·하로 나눠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작은정부 큰 시장제창, 공익과 사익의 조화 추구한 경세가(상)

   
▲ 이의춘 미디어펜 발행인
시장경제 존중하는 나라가 선진국

1997년 10월. 산소 호흡기를 맨 최종현 회장은 청와대를 예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최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긴급 제안했다.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경제가 큰일난다”고 강조했다. 금리인하, 5년간 임금동결, 환율 인상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별 말이 없었다. 최 회장은 그해 11월 다시금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재차 방문했다. 대통령은 경청하지 않았다. 그 후 1개월 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청와대가 최 회장의 비상조치 건의를 묵살한 것은 조선왕조 600년 이래 내려온 주자학적 사농공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다. 선비로 통칭되는 청와대관료들의 계급적 우월감과 공상 계급에 대한 하대가 정신적 근저에 깔려있다. “장사치들이 뭘 알아?”라는 관료들의 오만함이 팽배했다. 관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이끌어간다는 한국적 수직적 정경문화의 폐단이 강하게 드러난 사례다.

최 회장은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조화를 추구한 경세가였다. SK그룹경영에 힘쓰면서도 재계총리로서 국가경제와 국가경쟁력강화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한국정부만큼 재계의 의견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 나라도 드물다. 일본 정부는 재계대표단체인 경단련 회장의 말은 경청해준다. 아베총리도 올 들어 사카키바라 경단련 회장단과 정책 연석회의를 갖고 재계의견을 수렴했다. 한국은 전경련회장이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말을 하면 곧바로 ‘괘씸죄’에 걸린다.

박근혜대통령도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30대그룹 회장들을 일제히 불러서 지시와 훈계성 발언을 하곤 한다. 총수들은 면피용 발언을 한마디씩 하고 만다. 대통령과 재계 회장 간에 국정운영과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대해 활발한 토론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최회장은 95년 3번째 전경련회장 취임 날 대기업규제정책에 대해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설화(舌禍)를 겪었다. 김영삼 정부가 소유분산을 통해 경제력집중을 억제하고, 그룹경영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조정실을 해체하는 것을 포함한 경제개혁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최 회장은 “문어발이니 업종전문화정책은 무한경쟁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 2008년 고 최종현 회장의 10주기를 맞아 SK그룹은 고인의 경영철학과 국가관 등을 재조명한 추모서적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를 발간했다.

최 회장은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에 대비해 기업과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 회장의 이 같은 쓴 소리는 작은 정부에 대한 강한 소신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시콜콜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 문제로 기업에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산업정책에 대해 일일이 규제를 가하는 것은 기업경쟁력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자유와 창의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것이라고 봤다.

청와대는 난리법석을 피웠다. 한리헌 경제수석은 감히 재계가 정부정책에 대든다며 흥분을 했다. 청와대와 재경부 공정위 국세청은 재벌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데 암묵적인 공조를 취했다. 국세청은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내부거래조사의 칼을 들이댔다. 전방위 보복을 단행한 것이다.

최 회장은 다음날 과천청사 홍재형 부총리 사무실에 찾아갔다. 전날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재계총리가 경제부총리에게 머리를 수그린 것으로 일단락을 맺었다. 사농공상의 계급적 질서는 20세기에도 여전했다. 재계는 그저 정부정책에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고압적 집단의식에 관료사회에 팽배했다. 겉으론 최회장의 완패로 끝났다. 정부는 ‘슈퍼갑’이고, 재계는 영원한 ‘슈퍼을’이었다. 갑을관계는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시장경제 주창자였다. 50년대 시장경제의 메카 시카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시장경제 신봉자가 됐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와 동문수학했다. 시카고학풍에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채택해야만 세계초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시장경제원리를 존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시장경제는 자유기업경제라고 했다.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국민들이 좀 더 잘살기 위해선 기업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도 “시장경제의 요체는 정부가 기업에 공갈과 협박을 하지 못하는 경제”라고 했다. 정치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경제가 정치를 이끌어가는 체제를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시장경제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사유재산권 보장과 사익추구 인정이었다. 기업과 선택의 자유, 경쟁촉진, 시장 그리고 작은 정부도 핵심요소였다. 결국 최 회장이 꿈꾸는 시장경제는 ‘작은 정부, 큰 시장’으로 집약된다.

   
▲ SK는 세계화에 앞장선 기업이기도 했다. 최종현 회장은 유공을 전격적으로 인수하여 석유화학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다. SK루브리컨츠의 스페인 카르타헤나 윤활기유 공장 전경/사진=SK루브리컨츠

그는 작은 정부야말로 초일류국가로 가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우기위해선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로 가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공무원 수를 10분의 1로 줄이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정부는 비즈니스를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국방 치안 외교 등을 제외하곤 모두 민영에 맡기는 민영화를 단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는 기업 활동에 간여해서도 안 된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소유, 운영 중인 영리단체는 모두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공사도 민영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철도 항공항만 해운과 모든 정보 통신 업무, 그리고 우편업무의 상당부분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통신(현 KT),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포스코, 담배인삼공사(KT&G)등을 민영화했다. 반면 좌파 노무현정부와 우파정권인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정부의 공기업 민영화는 중단상태에 있다. 코레일 민영화 논란에서 드러났듯이 노조와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경영과 방만 경영, 적자심화 등은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 회장은 경제전쟁 시대 정부의 주된 기능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경제의 주인공은 기업과 국민이지, 결코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 군림해서 안 된다고 했다. 상품을 팔고 서비스를 한다는 마음자세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정부를 제창한 이유는 무엇인가? 큰 시장, 작은 정부가 가장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공무원 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 봉급을 4~5배로 올려줘야 한다고 봤다. 클린정부, 공무원사회의 부패를 없애는 데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부패하면 결국 정부의 능률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세제부문의 개혁도 제안했다. 소득세는 누진세를 없애고, 비례세로 해야 한다고 했다. 누진세는 고소득자들의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상실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속세도 누진세 대신 단일세율로 가야 한다고 했다. 1세들의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좌절시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노사문제도 제3의 해법을 제시했다. 회사의 'more work, less pay' 주장과 노조의 'less work, more pay' 요구를 조화시킨 'more work, more pay'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이익이 나면 근로자와 경영자가 다 같이 배당을 받는 특별보너스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SK는 이 같은 노사상생으로 인해 다른 기업들에 비해 파업 등 분규가 거의 없다.

국민연금 개혁방안도 눈길을 끈다. 이대로 가면 선진국처럼 국가재정적자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연금제도를 확대하기보다는 연금보험을 민영화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정부의 직접적 보조대상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최근 적자가 심화하는 공무원연금개혁을 추진 중이다. 최 회장은 20여 년 전부터 공무원연금 적자의 심각성을 꿰뚫어보고 선제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최 회장은 한국을 세계일등국가로 만드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전략이 무엇일까에 골몰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박사들과 세계일등 국가 전략에 대해 수많은 토의를 했다. 93년 전경련 회장취임이후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대한민국을 초일류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강한 열정을 가졌다. 1인당 국민소득 6만 달러를 달성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98년 죽음을 눈앞에 둔 폐암말기 투병 속에도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을 낼 정도였다.

자유기업센터(현 자유경제원) 설립 등 한국의 헤리티지재단 꿈꾸다

최 회장은 한국의 헤리티지 재단을 만드는데 열정을 쏟았다.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공화당의 싱크탱크이자, 작은 정부, 큰 시장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세계적인 연구소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한국에도 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하고, 확산시키는 핵심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첫 결실은 자유기업센터의 설립이었다. 전경련이 수백억 원의 기금을 출연해 자유기업센터를 발족시켰다. 자유기업센터는 아담 스미스, 프리드리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명저 발간을 주도했다. 자유기업센터는 그 후 자유기업원을 거쳐 자유경제원으로 바뀌었다. 자유경제원은 현재 반시장적 경제민주화와 분배 평등 형평의 사회민주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학의 한국화를 추진한 것은 최 회장의 또 다른 업적이다.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기위해선 한국적 현실에 맞는 경제학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미식 경제학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그가 생존할 때 선진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 3만 달러였다. 그는 한국이 서구를 단순히 추종하려면 영미식 경제이론과 모델을 그대로 따라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서구선진국보다 국민소득이 2~3배나 앞서는 초일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한국현실에 맞는 기업이론과 경제이론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가 제시한 초일류 선진 국가는 원숙한 사회,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다. 현대의 서양경제이론의 인간관, 기업관, 그리고 국가경제이론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의 대명사인 폴 새무엘슨 MIT대 교수의 <경제학>을 그대로 답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첫째, 인간의 마음을 도외시한다. 경제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인데도, 많은 경우 수학 및 통계학위주의 논문에 치우쳐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를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 경제의 주체는 사람인데, 사람을 도외시한
경제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서양경제학은 주로 개인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는 공동체주의 문화가 발달했다. 지연 학연 혈연 중시하는 문화다.

둘째, 미국 경제학은 내수중시형 경제학이다. 한국은 주력산업이 대부분 수출산업이다. 미국은 수출비중이 매우 낮다. 수출비중이 높기 때문에 환율 이자율에 상관없이 공장을 계속 돌려야 한다. 미국기업들은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경제규모는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미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은 세계1등이었다. 기업과 산업, 국가경제의 성장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플레와 실업이 주된 관심사였다.

내수시장 중심의 미국식 경제이론은 성장과 무역이 중시되는 한국경제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셋째, 미국경제는 무역적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무역적자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다. 달러를 찍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무역수지가 중요하다. IMF전 96년에 무역적자가 200억 달러나 됐다. 최 회장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대규모 무역적자는 심각한 경제위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영미식 경제학에 젖은 한국 관료와 학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만 했다.

넷째, 미국경제학은 정부의 실패보다는 시장의 실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가상적인 상태에서 시장만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분석한다. 시장이 작동할 경우 별 문제가 없다. 시장이 잘 작동되지 못하는 경우 정부가 개입하여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다섯째, 미국경제학은 수학논리를 과신한다. 수학을 통해서는 인간의 경제행위의 양적인 면, 도식화한 것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경제행위의 정신적인 면, 질적인 면은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다.

여섯째, 미국경제학은 중시(中視)경제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미는 국가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매크로(거시)경제학과 개인과 기업을 다루는 마이크로(미시)경제학의 둘로 나눌 뿐이다. 반면 한국은 일본 독일처럼 국가와 기업 사이에 기업그룹이 존재하는 점이 다르다. 한국의 재벌, 일본의 게이레쓰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제단위를 연구하는 것이 중시경제학이다. 미국경제학은 기업그룹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시경제학도 다루지 않는다. 영미경제학에 젖은 경제학자들은 재벌과 기업그룹을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IMF는 영미식 경제학처방의 대표적인 국제기구다. IMF가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고금리정책과 재정긴축을 요구한 것은 매우 잘못된 정책이었다. 태국 인도네시아에 대한 IMF처방도 문제가 많았다. 이들 나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시카고스쿨의 통화주의자들이 남미국가(칠레제외)들을 망쳐놓았다고 비판했다.

   
▲ 최종현 회장은 남들이 하지 않는 정보통신사업에 한발 먼저 진출해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SK텔레콤을 세계적인 통신사로 발전시켰다. SK텔레콤은 6월 19일 서울 중구 을지로 소재 SK-T타워에서 간담회를 갖고 스마트폰 출시를 포함한 LTE보다 3배 빠른 ‘광대역 LTE-A’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 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한국의 경제학 교과서들이 근본 경제문제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은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했다. 성장을 바탕으로 분배문제, 국제수지문제, 환경개선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경제가 성숙단계에 있고, 제조업경쟁력이 세계최강이다. 미국경제학이 안정과 물가관리에 치중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성장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에 맞는 경제학모델이 필요하다고 봤다.

최 회장은 전경련회장 시절 정부가 저금리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는 최회장의 주장과는 반대로 구조조정과 안정 등 총수요억제정책에 치중했다. 김영삼 정부 경제팀과 최회장간에는 성장과 안정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대립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통화주의자들과 강하게 대립각을 형성했다. 화폐 수량설을 신봉하는 관료와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80년대 후반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할 때 정부가 통안증권을 발행해 통화를 흡수한 것은 기업들의 조달 금리를 높여서 기업들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는 최 회장의 지론이었다. 이것이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 회장의 경제학의 한국화는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경제는 지금 저성장 실업증가, 양극화 및 분배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경제가 이들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최 회장의 주장처럼 성장이 우선시돼야 한다. 좌파학자들은 한국경제의 문제가 분배와 형평 등 경제민주화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성장과 효율을 소홀히 하고 평등 분배, 균형개발, 반기업 정책으로 가는 것은 경제를 더욱 침체로 떨어뜨릴 뿐이다.

그의 한국적 현실에 맞는 경제학정립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국적 경제학이란 용어자체에 거부감을 보이는 학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도래 예견하다

최 회장은 90년대 초반부터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을 언급했다. 지금은 일상용어가 됐지만, 당시엔 생소한 단어였다. 국내 인사 가운데 세계화시대의 도래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수년 후 96년 세계화 선언을 했을 정도로 최 회장의 국제경제흐름을 꿰뚫는 선견지명은 뛰어났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도래를 강조한 것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국가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선 민간주도의 시장경제체체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봤다.

최 회장은 93년 전경련 상의 무협 경총 기협중앙회 등 경제5단체가 참여하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기업경쟁력 대신 국가경쟁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세계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기업만이 아닌 국가경쟁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쟁력이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고질적인 병폐인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뜯어고치고, 과감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데 힘썼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강해야 하고, 국제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많아 나와야 국가의 경쟁력도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해선 대기업과 기업그룹의 역할을 중시했다. 선진국의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선 한국에도 대기업이 많아야 했다. 대기업은 수많은 중소기업을 거느리게 된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대국이 된 것은 대기업과 기업그룹조직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그는 못사는 나라의 특징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없다는 점이다. 잘사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많다.
최회장 주도의 국가경쟁력 강화사업은 우루과이 라운드(UR)타결 등 국제경제환경 변화 속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혁신과 기업가정신의 아이콘

최 회장은 그룹경영에서 10년, 20년, 30년앞을 내다보는 경영을 했다. 임직원들에게 항상 “10년 뒤에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봤습니까?”를 질문했다. 그가 10년 앞을 내다보고 포석을 하는데 세가지 원칙을 지켰다.

첫째,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해야 한다. 둘째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셋째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최 회장이 삼성과 LG가 선점한 전자 가전 사업에 뛰어들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SK텔레콤을 세계적인 통신사로 발전시킨 것은 남들이 하는 가전 사업을 하지 않는 대신 정보통신사업에 한발 먼저 진출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전하는 사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도전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를 갖고 담대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위험부담을 안고 신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기업가정신이 어느 기업가보다도 왕성했다.

SK그룹 성장사는 혁신과 도전의 역사였다. 국내 최초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60년대 경쟁사들이 직물생산에 안주하고 있을 때, 폴리에스터원사공장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원사공장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었다. 당시로선 무모하고 불가능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선경직물은 자본금이 5000만원에 불과했다. 원사공장 투자규모는 무려 32억원이나 됐다. 당시 창업주이자 형인 최종건도 동생 최종현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일본 최고의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갖고 있던 데이진과 기술이전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투자자금도 데이진 등 일본에서 조달했다.

최 회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본출장길에 올랐다. 기술을 가진 일본기업들에게 번번이 딱지만 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일본기업을 끈질기게 설득해 기술을 이전받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대규모 투자자금도 일본거래기업의 지급보증을 통해 해결하는 창의적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만 생산하던 폴리에스터필름 국산화에 나섰다. 숱한 실패와 그룹의 부도 위기 속에서 끝내 성공했다. 당시 국산화에 400억 원이 투입됐다. 회사는 자금난에 빠지고, 고리대의 급전까지 조달했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최 회장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뚝심으로 연구개발진을 격려했다. 국산화개발에 사투를 벌인지 2년 만에 독자적인 기술로 폴리에스터 필름을 개발하는 성공했다.

80년대 유공을 인수한 것도 정경유착 등의 시비가 붙지만, 10년 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유공의 매출은 당시 선경그룹의 10배나 컸다. 삼성 현대 등을 제치고 선경이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최 회장은 그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과 끈끈한 인맥을 쌓아 정유 산업 진출에 대비했다. SK는 유공인수로 섬유 원사업체에서 종합 에너지 및 화학기업으로 도약했다. 사세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재계10위로 점프했다.

94년 한국이동통신업을 인수하면서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을 주도한 것도 10년 앞을 내다본 치밀한 준비가 결실을 맺었다. 당시 인수가격은 시세보다 2000억 원이나 비쌌다. 그룹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면 인수가격 부담은 중요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이미 80년대부터 정보통신산업이 미래 핵심 산업이라는 확신을 갖고 관련 조직신설과 투자를 해왔다. 96년엔 이통 업계 세계최초로 CDMA(코드부호다중접속방식) 상용화에 성공했다. 최 회장은 정보통신산업 진출 10년과 이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재계보다 한발 앞서 준비하고 설계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했기에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업을 키울 수 있었다. [미디어펜=이의춘 발행인junglee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