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아사다 마오가 손잡으면?…냉전 한·일 관계 녹일 스포츠 외교 시험대

   
▲ 조우석 문화평론가
사회 원로다운 멋진 조언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90세가 다 된 분이 국제감각은 물론 너른 시야와 참신한 발상까지 멋졌다. 지난 2월 몇 차례 자리를 함께 했던 지갑종(87)유엔참전국협회장이 그 분이다. 그때가 소치동계올림픽 기간이라서 우리의 화제는 러시아 귀화 선수 빅토르 안(안현수)과 피겨 선수 김연아에 집중됐다. 
 
그 분과 대화 중 이내 메모를 시작했는데, 이 나라 정치인이나 청와대 비서진이 함께 들었으면 하는 말씀을 거푸 쏟아냈다. 빅토르 안이 연이어 메달 사냥에 성공하면서 국민감정이 좀 복잡해지던 무렵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빅토르 안 선수의 러시아 귀화가 체육계 부조리 탓은 아닌가?"를 물었다. 그런 접근이 적절했을까? 지 회장의 해법은 전혀 달랐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빅토르 안에게 축전을 보내고 러시아가 축제 분위기라지만, 우리 대통령도 더 열렬한 축전을 즉각 보냈어야 했습니다. 속상해 하고 들끓던 네티즌들도 대통령의 통 큰 행보를 바로 이해했을 것이고, 여론 반전도 이뤄졌을 거예요. 그런 모습 대신 대통령은 체육계 비리 조사부터 지시했는데, 그건 청와대 스텝들이 결정적으로 잘못 보필한 겁니다."

   
▲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가 러시아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열린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고 신다운과 포옹을 하고 있다. /뉴시스
"안현수 선수는 여전히 한국의 아들" 박 대통령이 그 말만 했어도

당시처럼 움직일 경우 우리와 빅토르 안은 영원히 남남이 되어버린다. 그가 나중 한국을 찾아 선산에 인사도 하고 팬도 만나야 하는데, 그런 걸 모두 차단하는 건 도무지 현명하지 않다. 경직된 민족감정에 빠지거나, 자중지란에 빠지기보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빅토르 안을 부채(負債) 아닌 사회적 자산으로 끌어올릴 방법은 없을까? 지 회장이 보여준 해법은 너무도 쉽고 간단했다.

"선수단이 귀국한 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자리가 만들어질 거 아녜요? 그때 대통령께서 한 말씀을 하시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수단 여러분과 함께 있어야 할 분이 있다. 멀리 있고, 다른 사정 때문에 여기에 못 온 안현수 선수가 그러한데, 그는 지금 러시아 국적이지만 여전히 한국의 아들로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자랑스럽다.' 정치가 뭡니까? 통합의 예술 아닙니까?"

그대로만 했다면, 이 글로벌 시대에 안 어울리는 속 좁은 국가주의-민족주의 심리도 녹이고, 스포츠계도 신바람이 났을 것이다. 그날 얘기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는데, 그게 김연아 선수를 껄끄러운 한일관계를 녹이는 스포츠 외교의 빅 카드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올림픽이 끝난 적절한 시점에 김연아가 일본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초청하는 구상이다.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의 손을 잡고 한일 양국을 누비게 하라"

빙상연맹은 뒤로 빠지고 김연아가 앞에 나서 아사다 마오를 부르는데, 영종도 공항에 마중 나가 아사다 마오를 끌어안는 그림은 얼마나 보기 좋고 흐뭇할까! 두 스타가 손을 잡고 강연도 하고 팬 사인회를 벌인다면 일본이 감동에 빠져들 것이고, 세계의 스포츠팬이 열광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들끓어온 혐한(嫌韓) 감정도 조금씩 수그러들고, 양국 사이가 훈훈해진다. 결정적으로 내년으로 수교 반세기를 맞는 한일관계가 한 단계 성숙해질 수도 있다. 그런 게 바로 공공외교-민간외교의 표본이 아닐까?

김연아의 아사다 마오 초청은 지금도 유효하고 검토해볼 가치가 높은데, 이 얘기를 꺼낸 건 한국 스포츠 외교가 다시 시험대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올림픽 분산 개최 구상 때문인데, IOC 위원장이 2018평창동계올림픽과 2020도쿄하계올림픽의 분산 개최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내 반응은 싸늘하다.

당장 한국 정부는 "국민정서상 어렵다"고 손을 저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IOC에서 공식 제안을 해와도 분산 개최를 반대한다고 언명했다. 국민정서? 다른 나라와는 되는 것도, 일본하고는 안 된다? 그걸 풀기 위해 앞장 서야할 공직자가 국민정서의 뒤에 숨어 직무유기를 하고 박수를 받는다?

이러면 안된다. 고위공무원의 수준이 그러하니 평창올림픽조직위나 강원도 반대 목소리를 낸다. 평창군은 대회 반납을 불사한다며 격앙된 분위기다. 정말 아니다. 자동반응에 가까운 거부와 떼쓰기란 국제사회에 예의가 아니다. 경기장 건설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강원도로서는 분산 개최란 굿뉴스일 수 있는데, 다짜고짜 반대부터 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 김연아가 201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금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2위는 카롤리나 코스트너(왼쪽), 3위는 아사다 마오. /뉴시스
한국 스포츠 외교 다시 커다란 시험대에 올라섰다

우리의 지지부진한 형편을 이미 꿰고 있는 IOC 측은 건설비 상당 부분과 함께 연간 300만~500만 달러의 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구체적 그림까지 그려 보인다. 도무지 반대할 이유가 없다. 동계올림픽 한일 분산 개최 카드를 기꺼이 받은 뒤, 반대급부로 바로 2년 뒤의 도쿄 하계올림픽 종목의 일부를 강원도에서 한다면, 한일은 물론 국제사회가 윈윈하는 게 아닐까?

일부 일간지에서 "검토해볼만하다"는 긍정적 사설을 내보낸 게 다행이지만, 이 정도론 안 된다. 국민감정 어쩌구를 말하는 정서를 감안해 보다 강하게 푸시를 해야한다. 분산 개최를 검토해야 할 결정적 이유는 그게 경제적 올림픽 운용을 위한 IOC의 큰 그림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면서, 그 틀 안에서 실리를 취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상식이다.

결정적으로 분산 개최는 한일관계 개선의 돌파구다. 지금처럼 경색된 양국 관계는 최악의 경우 외교안보적 파국의 위험성마저 안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정부의 실력으로는 풀어가기가 벅차다. 이 와중에 국제사회가 보내준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IOC의 이번 올림픽 분산 개최안이다. 중요한 건 한일 양국의 정치권과 최고지도자들이 돌파구를 뚫어내려는 전향적 자세다. 

참고로 지갑종 회장의 보석 같은 조언을 필자는 그 다음 날 정부 쪽 인사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필자의 말을 전해들은 그도 반색했고 충분히 알아듣는 눈치였다. 며칠 뒤 그 공무원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뜻밖이었다.

올림픽 분산 개최 건은 이 정부 실력을 점검해볼 절호의 기회

"그 멋진 아이디어를 그대로 전했는데, 저만 왕창 깨졌습니다. 왜 요즘 한일관계의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눈치 없이 저런 말을 꺼내는 거야? 그런 싸늘한 분위기에서 눈총만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는 없었던 일로…"

아찔했다. 공무원 사회 분위기가 저렇게 경직됐다는 걸 그때 재확인했다.좋다. 올림픽 분산 개최 건은 그때보다 판이 훨씬 크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려있으니 이 아마추어 정부와 한심한 공무원들의 진짜 실력을 다시 점검해볼 기회다.

그리고 또 하나. 멋쟁이 지갑종 회장이 어떤 분인가 궁금한 분이 많으실텐데, 그는 로이터통신 등에서 기자생활을 한 뒤 12대 국회의원도 했다. 산부인과 아내에게 생업을 맡긴 채 사재(私財)를 털어 민간외교와 애국운동에 전념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6·25전쟁 때 김일성이 타고 다니던 소련제 승용차를 어렵게 확보해 용산 전쟁기념관에 기증한 것도 그 분이다. 얼마 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