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집단 앞에 공권력 무력…도덕 상실 분열의 사회로 치달아
정부의 단기적 정책성과를 위한 개입, 포퓰리즘 통제가 만연하면, 기업은 위험을 감수하며 혁신과 창조에 나서지 않기 마련이다. 자유가 보장된 환경이 조성될 때, 13척으로 왜함 330척을 쳐부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같은 기업가정신도 발휘 될 수 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창조경제의 씨앗들이 싹을 트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장의 보복을 부추기는 분열의 철학과 정책을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경제원이 이러한 취지에서 2014년 한 해를 되돌아보고 2015년 새해를 열기 위한 대토론회를 16일 개최했다. 아래 글은 자유경제원의 <분열의 철학, 정책 버리고 성장으로 가자> 특별토론회에서 복거일 소설가가 발표한 기조연설문이다.

 

   
▲ 복거일 소설가

서언

이 자리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사회적 분열이다. 자연히, 사회에 대한 고찰이 앞서야 한다.

사회란 말은 거의 언제나 인류 사회를 뜻한다. 그러나 사회의 본질과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른 사회들도 살펴야 한다. 먼저 개미나 벌처럼 잘 짜인 사회를 이룬 종들을 포함해서 널리 살펴야 한다. 어떤 뜻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유전자나 세포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회들을 살피는 일이다. 그렇게 널리 그리고 깊이 살펴야, 비로소 사회의 본질이 또렷이 드러난다.

생각해 보면, 모든 생명체들은 사회적 존재다. 생명의 본질은 생식을 통한 영속인데, 생식은 한 개체에 의해 다른 개체가 만들어지는 일이므로 본질적으로 사회적 사건이다. 배우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인 유성생식은 사회적 특질이 더욱 짙다. 사회에 관한 논의들은 그 사실을 늘 고려해야 한다.

   
▲ “우리는 모든 생명체들을 생태계라는 궁극적 사회의 구성원들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에게 그들이 누려야 마땅한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복거일 소설가. 

응집력

사회는 자기 이익만을 챙기고 사회의 유지에는 관심이 없는 개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든 사회들의 중심적 문제는 응집력(cohesion)의 확보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사회에 속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때에만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구성원들이 협력해서 보는 혜택이 개별 이익을 공동 이익에 종속시켜서 치르는 비용보다 커야 한다. 협력을 통해서 개체들이 이익을 얻을 기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끝까지 협력하는 대신 중간에 배신하면 훨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므로, 배신자들이 나올 가능성은 늘 있다. 따라서 응집력을 확보하는 길은 실제로는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을 찾는 것이다.

배신 방지의 원리는 간단하다. 유전자들이 생명의 근본이므로, 개체들의 궁극적 이익은 자신들의 유전자들의 존속이다. 자연히, 유전자들이 사회를 통해서만 존속될 수 있도록 하면, 개체들의 배신은 나올 수 없다.

그런 원리를 실행하는 길들은 다양하다. 유전자의 수준에선, 난자와 정자를 생산할 때 유전자들을 철저하게 뒤섞어서 무작위적 선택을 한다. 세포의 수준에선, 성세포들을 체세포들로부터 분리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 개체의 수준에선, 여왕만 생식하도록 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 우리는 여기서 새삼 확인한다, 공정한 사회만이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확보한다는 사실을.

개미, 벌, 그리고 흰개미는 여왕이 생식을 독점한다. 따라서 다른 개체들은 생식할 수도 없고, 모두 여왕의 자식들이므로 혈연적으로 가까워서 배신할 필요도 없다. 덕분에 그런 종들의 사회는 번창한다.

상호적 이타주의

뇌가 발전해서 개체들의 지능이 본능보다 중요해지면, 혈연이 없는 개체들이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선 혈연만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대신 협력을 통한 이익의 추구가 응집력을 제공한다. 상대를 잘 대해주어 궁극적으로 자기 이익을 실현하므로, 이런 행태는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 불린다. 이것이 인류 문명을 낳은 근본적 힘이다.

상호적 이타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배신을 방지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혈연이 없는 개체들이 협력을 통해 큰 이익을 얻으려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배신하지 않아서 협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협력이 나온다. 그런 믿음을 제공하는 것이 도덕이다. 풍습이나 법과 같은 사회적 강제는 도덕을 강화하는 장치들에 지나지 않는다.

   
▲ 소설가 복거일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데 재산은 필수적이다. 사람은 ‘자기 것’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으로 타인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방해하기도 한다. 성미산 마을공동체 회원들이 홍익대가 사유지에다 지으려는 기숙사 건립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재산권

통념과 달리, 도덕심은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했다. 생명체들은 재산이 삶에 도움이 되므로 그것을 만든다. 눈에 잘 뜨이는 예는 동물들이 만드는 고치나 둥지다.

생명이 깃든 육신과 그것의 생존을 돕는 재산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없다. 둘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었으므로, 재산은 ‘확장된 육신’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생명체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 애쓴다.

동물들이 둥지와 그 둘레의 땅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영역성(territoriality)은 전형적이다. 산책 길에서 애완견들이 주기적으로 소변을 보아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행태는 그런 본능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재산은 사람의 생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데 재산은 필수적이다. 사람은 ‘자기 것’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어린애들이 닳은 담요나 너덜너덜해진 인형에 큰 애착을 지니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재산의 소유를 “현상계에서 인간의 자유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산이 그리도 중요하므로, 그것에 대한 권리인 재산권은 가장 근본적인 제도다. 사회철학은 본질적으로 재산권에 관한 이론들이고 사회 체제들은 재산권의 모습이 구체화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재산권의 바탕은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이다. 어떤 재산을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이 공헌의 정도에 따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 기준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어서, 우리는 다른 기준을 생각해낼 수 없다. 공산주의도 이 기준을 따르니, 마르크스를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재산권은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감의 진화

당연히, 재산권에 대한 침해는 거센 분개를 불러낸다. 사람은 특히 격렬하게 반응한다. 동물들의 영역성엔 한계가 있지만, 사람은 애국심이라는 형태로 영역성을 극대화한다.

재산권의 침해에 대한 이런 분개가 정의감의 원초적 형태였다. 자기가 힘들여 마련한 재산을 남이 차지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느낀다. 그렇게 거센 감정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친다.

다른 고등 동물들도 이런 원초적 정의감을 보인다. 예컨대, 원숭이들은 자신이 동료들보다 나쁜 대우를 받으면 분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원숭이가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상호적 이타주의가 혈연을 보완하는 원리가 되자, 정의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배신해서 당장의 큰 이익을 노리는 사람은 사회의 응집력을 해치는 존재가 되었고, 당연히 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아울러 정의감은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했다.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수준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모습으로 정의감이 다듬어졌고, 그런 정의감은 상호적 이타주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한 정의감이 도덕심의 핵심이다.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바로 ‘무엇이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 정의롭지 않은 도덕심이나 도덕률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진화의 산물이므로, 정의감은 모든 인류가 공유한다. 실제로, 모든 사회들의 윤리 규범들과 모든 종교들의 계명들이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는 도덕적 ‘문법’을 공유하고 필요에 따라 도덕률을 만들어낸다.

   
▲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한 정의감이 도덕심의 핵심이다. 정의롭지 않은 도덕심이나 도덕률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정의감은 모든 인류가 공유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IS의 제노사이드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부터 시작해서 누군가 남의 것을 강탈하는 강도 행위에 대해서 모두가 공분하는 것은 이에 따른 것이다. 사진은 IS에 처참하게 살해된 같은 수니파 민병대원. 

허물어진 도덕을 세우는 길

이처럼 중요한 도덕이 허물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응집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그 사실이 괴롭게 드러났다.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의 자그마한 이익이나 편안함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험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원숙해진 우리 사회에 걸맞은 도덕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1970년대에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액셀로드는 ‘가상 공간’에서 컴퓨터 프로그램들로 협력 경기를 실험했다. 두 경기자들이 협력하면, 둘이 작은 이익을 나누어 갖지만, 한쪽이 배신하면, 그가 큰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죄수의 양난(prisoner’s dilemma)을 응용한 것이다.

궁극적 우승자는 ‘되갚기(TIT FOR TAT)’라는 가장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 프로그램은 ‘일단 협력하고 그 뒤엔 상대가 하는 대로 따라 한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새로운 상대를 만나면, ‘되갚기’는 일단 협력한다.

상대가 협력하면, 계속 협력해서 협력의 이익을 나눈다. 상대가 배신하면, 협력을 거부해서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다. 반면에, 배신을 일삼는 ‘똑똑한’ 프로그램들은 점차 외면을 받아서 배신의 큰 이익은 물론이고 협력의 작은 이익도 보지 못한다. 너무 너그러운 프로그램들은 ‘똑똑한’ 프로그램들에게 배신당해서 손해를 본다.

‘되갚기’는 도덕적 전략이다. 그것은 결코 먼저 배신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신을 응징한다. 즉 도덕적 전략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응징이다. 협력은 협력으로 보답받고, 배신은 배신으로 보답받는다. 바로 이것이 상호적 이타주의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협력 경기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만들수록 협력적인 프로그램들이 득세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본질적 특질이 협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도 엿본다.

법의 지배

이 원리는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약속이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처음엔 큰 이익을 보지만, 그 뒤로 신용을 잃어 경제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 속아도 그냥 넘어가는 기업은 거덜나서 사라진다. ‘되갚기’처럼 모든 상대들과 협력하되, 배신하면, 단호히 관계를 끊어 응징하는 사람들과 기업들이 번창한다.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들과 기업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도덕 수준이 높아진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선 가장 중요한 약속인 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응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떼법’이라는 이기적 집단들의 범법 앞에 공권력은 무력하고, 심지어 취한에게 파출소 순경들이 공격받고, 정의를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사법부는 구조적으로 부패해서 ‘전관예우’가 관행이 되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양심적 시민들도 법을 지킬 마음이 줄어든다. 허물어진 도덕을 세우려면, 법을 어긴 사람들을 응징해야 한다. 적어도 법을 어기는 일이 이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도덕이 허물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응집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세월호 참사에서 그 사실이 드러났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의 자그마한 이익이나 편안함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험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시장의 도덕적 기능

그러나 법의 엄격한 시행만으로 도덕을 튼튼하게 하기는 어렵다. 시장에선 시민들이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어서 나누고 배신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응징하므로, 도덕적 개인들과 기업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정부의 관리들에겐 이런 상호적 이타주의가 작용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필요한 결정들은 대부분 개인들이 내리는 ‘개인적 선택’들이다. 그런 선택들을 우리는 시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결정들은, 예컨대 입법, 치안, 국방, 구휼과 같은 것들은, 사회 전체가 내리는 것이 낫다. 이런 ‘사회적 선택’들을 하는 기구가 정부다.

상호적 이타주의가 정부에선 작용하지 않으므로, 정부가 커지면, 시민들이 이타적 상호주의를 발휘할 마당이 줄어들어, 그 자체로 도덕 수준이 낮아진다. 역사적으로, 도덕 수준은 상업이 발달한 시민 사회들에서 으레 높았다. 게다가 시민들은 관리들에 대해선 무력하므로, 큰 권한을 쥔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게 된다. 액튼 경의 지적대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정을 누그러뜨리는 길은 정부의 몫을 줄이고 시장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세금과 규제를 되도록 줄여서 정부의 몸집과 권한을 줄이면, 부정의 소지가 원천적으로 줄어든다. 정부가 커지면, 부패가 늘어나고, 도덕 수준이 낮아진다.

시장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도덕 수준을 높인다. 시장은 정부보다 효율적이므로, 시장이 커지고 정부가 상대적으로 줄어들면, 경제가 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경제 성장은 시민들의 물질적 풍요를 늘릴 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 개인들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 관용을 늘려서, 사회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든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책무

물질적 이익과 결부되는 시장이 시민들의 도덕심을 높인다는 얘기는 우리의 통념이나 직관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심의 핵심인 정의감이 애초에 재산과 관련되어 진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런 얘기가 덜 이상하게 들린다. 시장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 내리는 결정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장이 문득 새로운 모습을 한다. 정부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가정에 돌아오면, 소비자들이고 그래서 시장의 일부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의 응집력을 늘려 사회적 분열을 줄이는 가장 근본적 처방은 시장을 믿고 시장 경제를 보다 이상적 형태로 다듬어나가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以吏爲師)”는 한비자의 주장을 따른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낯선 주장이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책무가 무겁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