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김정일 '핏줄사랑'이 몰락의 씨앗…좌파 운동 재구성 계기

   
▲ 조우석 문화평론가
북한이 김정일 3년 탈상(脫喪)과 함께 이른바 백두산 대국을 선포했다. 어제 17일의 일이다. 3대 세습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은 시대가 본격화되는 내년을 저들은 '김정은 조선의 원년(元年)'으로 선포할 것이다. '백두산 대국'에, 김정은 시대 원년이란 말은 허장성세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막상 2015년은 평양 급변사태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내년 초 미-북 접촉이 성과 없을 경우 4차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고, 이 움직임이 평양 발 위기를 낳을 것이다. 그 점에서 단행본 <2015년 김정은 급변 터질 것인가>를 쓴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의 대담한 예측에 필자는 강하게 끌린다. 2015년의 화두는 개헌도, 대권주자도 아니고 북한이 될 것이고, 그건 역사의 신이 오래 준비해왔던 평양 몰락의 대형 드라마라고 그는 관측했다.

맞다. 인류가 경험한 20세기 전체주의 통치의 끝을 달려온 북한의 붕괴는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데, 평양 몰락은 1919년 3‧1운동 이후 펼쳐진 한국인 공산주의운동사 100년의 격렬한 재구성을 몰고 올 것이다. 이 사안은 간단치 않다. 내일로 예정된 통진당 해산 선고 일정과도 맞물려 좌파 정치의 전면 재구성과 이 땅의 얼빠진 종북주의자들의 대청소 파동까지 몰고 올 것이다.

김일성, 1947년 공관 호수에서 죽은 자식 '슈라' 위한 굿판을 벌였다

그만큼 내년 평양의 드라마는 국내 정치의 핵심 변수인데, 필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김일성-김정은-김정은 세습 권력 3대를 풀어보려 한다. 내년으로 70년을 맞는 세 독재자의 등장과 몰락의 드라마는 실은 김씨 집안의 유별난 '핏줄 사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분석이다.
 

시작은 김일성이다. 그가 주변에 자주했던 말 중의 하나가 이랬다. "공산주의자도 자기 자식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어." 그게 황장엽의 증언인데, 김일성은 처음에 후계자로 생각했던 동생 김영주를 그래서 쉽게 내쳤다. 김일성의 자식 사랑을 증명하는 게 1947년 평양의 자기 공관(公館)에서 벌인 엽기적인 추모 굿판이다.

그는 공관 내 호수에서 물놀이하다 익사한 세 살짜리 아들(정일의 동생 슈라)의 죽음을 너무 슬퍼했고, 그래서 넋을 씻어주는 전통적인 오구굿을 벌였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사망 10년 뒤에도 다시 무당과 스님을 수소문해 천도재를 올렸는데, 이 사실을 밝힌 것은 뜻밖에도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였다. 그는 <김정일 코드>란 책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김일성은 1947년 그의 어린 아들이 익사하자 대단히 상심하여 10년 뒤 그 장소(공관 호수)에서 무당을 시켜 굿을 했다. 북한 측 압수문서가 보관된 미국국립문서보관서에는 자식을 잃은 김일성의 상실삼과 고통을 달래주기 위해 스님이 쓴 글을 담은 기다란 족자가 한 점 있다.”

이 집안의 자식 사랑 DNA는 정일에게 이어졌다. 김정일은 1971년 첫 아들 정남을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얻은 뒤 엄청 기뻐했다. 신장 콤플렉스가 심했던 그는 아들이 엄마를 닮아 종아리가 긴 것도 자랑스러워했다.(관저 주변의 스텝들도 모두 긴 다리 체형인데, 김정일의 취향이다.) 9살짜리 정남을 스위스로 유학 보낼 때는 출발 며칠 전부터 술을 마신 채 울고불고 난리쳤다는 게 그와 20여년을 살았던 성혜랑(첫 부인 성혜림의 친언니)의 증언이다.

   
▲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3일자 2면에 김일성 김정일 화보를 게재하고 있다./뉴시스=사진 출처 노동신문
아버지 김일성을 신(神)의 반열에 올려놓은 김정일의 자충수

“술을 마시고 그는 아이처럼 울었다. ‘나 다 알아. 너희들 정남이 나한테서 떼내 가려는 거 다 알아.’ 너희들이란 나(혜랑), 혜림, 어머니(혜랑의 모친)를 말한다.… 눈물은 진심이었다. 우리도 울었다.”(<등나무집> 394쪽)
 

<등나무집>은 탈북기록 중 최고의 가치와 문학성을 가졌는데, 성혜랑은 김정일의 처형(妻兄)이었으나, “선생님”이라 부르던 김정일의 불같은 성질에 맞춰주며 관저에서 함께 살았다. 그의 글에는 두려움과 연민이 섞여있지만 관찰은 칼끝처럼 예리하다. 어쨌거나 이 기록물이 묘사한 울고불고 하던 김정일 모습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안겨준다. 아들을 위해 굿판을 벌였던 김일성을 꼭 닮았다.

그렇다고 정일이 공짜로 권력을 얻은 건 아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학습을 스스로 했다. 그 결과 경쟁자인 삼촌 김영주를 제쳤는데, '아버지 닮기'가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영화·연극을 총동원해 아버지 숭배를 전 사회에 유포시켰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세습 왕조가 세워지게 된 배후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려는 아들의 피나는 노력이 숨어있다.” 이 관찰은 <Mr. 김정일>을 쓴 미 저널리스트 마이클 브린의 통찰인데, 그건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숨겨진 나머지 진실이 훨씬 중요한데, 그건 코앞으로 다가온 북한 몰락의 씨앗은 ‘아버지처럼’을 신앙으로 삼았던 김정일의 권력욕이 결국 북한의 몰락을 낳았다는 점이다. 그게 포인트다.

   
▲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달 19일자 4면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위대학에 세웠다며 제막식 등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뉴시스=사진 출처 노동신문
내년은 김정은 조선의 원년이자 사악한 체제 대몰락의 시작

즉 1972년 개정 헌법에서 주체사상을 명문화했던 것도 동서 데탕트 물결에서 자구노력의 구호였지만, 그걸 주도한 게 김정일이다. 그렇게 탄생한 주체사상은 김정일 등장과 함께 신정국가 도그마로 자리 잡았다. 초기 기독교에 비유컨대 그는 신앙체계를 만들었던 사도 바울이었다. 그 덕분에 살아생전 아버지 김일성은 신(神)의 반열에 올랐다. 이걸 총지휘한 김정일은 실로 음흉한 권력의 화신이었다. 때문에 그야말로 현대북한 70년의 총 디자이너라고 해도 된다.
 

늙은 아버지는 그저 흐뭇했고, 젊은 아들은 권력을 넘겨받아 만족했다. 즉 김일성의 유산을 이어 받아 인노베이션을 했어야 할 2세는 자기 역할을 포기하면서 북한을 김일성교(敎)의 신앙집단으로 변질시켰고, 그게 북한의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게 현대북한을 보는 필자의 가설이다.

그런 김정일도 죽었고, 어제 탈상까지 마쳤다. '백두산 대국'에, 김정은 시대 원년을 선포하며 허장성세의 극치를 보여주는 손자 김정은도 이 집안의 유별난 핏줄 사랑 DNA를 이어받았으리라. 안타깝게도 인간적 품성은 선대에 비해 더욱 떨어진다. 종북주의자들은 김일성-김정일을 우러러볼 지 몰라도 본래 그들은 "그릇이 크지 못한 사람"이자 "인민의 권력을 훔친 대도(大盜)"에 불과하다는 황장엽의 판단이 백번 옳다.

그런 권력세습 3대는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북한현대사 70년은 사실 보잘 것이 없다. 인류사회가 기억할만한 성취도, 기여도 전무했다. 있다면 아버지가 만든 김일성교(敎)를 강화하면서 몰락을 재촉하는데 기여했던 김정일, 그런 할아버지-아버지의 유산 지키기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김정은 3대 사이의 엽기적 정치드라마일 뿐이다. 내년 한 해 저들의 몰락과 이 땅의 얼치기 종북주의자들의 동반몰락을 냉정하게 지켜볼 일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