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눈물 쏙 뺀 정몽준 막내아들, 전국구 유행어를 만들기까지
   
▲ 이원우 기자

이 말을 유행시킨 사람을 싫어할 순 있어도 이 말을 안 쓸 수는 없다. 세상은 얼마나 ‘미개한’ 곳인가?

계기는 선거였다. 6월4일 치러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화두는 오로지 세월호, 세월호, 세월호였다. 온 국민을 패닉에 빠뜨린 이 최악의 참사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밝히느냐가 중요했다. ‘실수 안 하기 대회’처럼 보인 구석도 없잖아 있었다.

서울시장 자리를 두고 격돌한 박원순-정몽준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에서 박원순을 딱히 승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미개 사건’은 적어도 정몽준을 확실하게 불리한 위치에 두는 멍에로 작용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언제나 뭔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패자(敗者)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관계는 간단하게 정리된다. 참사 발생 3일째인 4월18일, 정몽준 당시 경선후보의 재수생 막내아들 예선 씨가 세월호 문제와 관련된 페이스북 글에 “국민 정서가 자체가 굉장히 미개한데 대통령만 신적인 존재가 돼서 국민의 모든 니즈를 충족시키길 기대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거지” 등의 내용으로 댓글을 단 사건이다.

   
▲ 논란이 된 정 씨의 댓글

다섯 문장짜리 댓글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정 후보는 사과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그는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성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두 차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이 정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건 난해한 일이다. 경선후보 시절의 논란이라 본 선거까지의 시간이 꽤 긴데다 이 사건 후에도 ‘농약급식’ 같은 새로운 화두가 가세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후적인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3월26일 노컷뉴스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둘의 지지율은 정몽준 40.4%에 박원순 39.0%로 정 후보가 다소 앞서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직전인 4월14일 TV조선 여론조사의 경우 정몽준 48.5% vs 박원순 45.5%였다. 이 패턴은 ‘미개 사건’ 이후 뒤집혔다. 5월6일 MBN 여론조사의 경우 정몽준 37.0% vs 박원순 49.3%, 5월7일 중앙일보 조사의 경우 정몽준39.2% vs 박원순 45.6%로 집계됐다.

6월4일 본게임에서 나온 최종 결과는 정몽준 43.02% vs 박원순 56.12%(득표율 기준). ‘아들 발언’이 결국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올 만도 했다. 허나 선거는 그렇게 끝났지만 ‘미개’라는 말의 유행은 이때부터가 오히려 시작이었다. 정몽준 막내아들의 발언에 격분했던 사람들조차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인 정몽준 의원이 4월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막내 아들의 '세월호 침몰 사건'의 SNS 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가 지난 12월2일~9일간 진행한 ‘2014년을 달군 최고의 유행어는?’ 설문조사에서 ‘미개’는 13976표를 얻으며 2위에 올랐다. 이 단어가 정치 성향에 관계없는 범국민적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근거다.

누군가는 부족한 안전의식에 대해 말할 때, 누군가는 군부대 가혹행위 사건에 대해 말할 때, 누군가는 통진당 해산에 대해 말할 때 이 단어를 썼다. 지방선거에서는 후보를 낙선시켰던 이 단어가 유권자들의 일상에선 화려하게 당선된 셈이다.

‘미개 발언’이 어마어마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음에도 정몽준 경선후보가 새누리당 최종 후보로 낙점될 수 있었던 사실 역시 이 단어의 ‘파괴력’을 함축하고 있다. 이 논란이 외부의 적(敵)들에겐 공격 포인트로 작용했지만 정몽준 지지자들에게는 ‘결집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이 미묘한 공감대는 유행어의 이름으로 잔존하고 있다. 정몽준을 지지했건 지지하지 않았건, 지금 이 순간 많은 숫자의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국인은 미개하다… 나만 빼고.’

같은 단어도 상황과 정파와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분법적 현실을 미개(未開)라는 두 글자가 폭로했던, 2014년은 그런 해였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