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활성화 민생법안 상정저지 전력투구, 성장의 길 막고 싹 짓밟아

   
▲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정치는 아지트에 매몰된 진영논리만이 창궐하고 있다. 합리적인 소통과 토론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정치권은 성장의 길을 막고, 그 싹을 짓밟고 있다.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정권이 실패하기만 노리고 있다. 박근혜정부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제출한 제출한 각종 민생법안, 경제회복법안에 대해 상정을 거부하고, 반대만 한다. 새민련은 법안 통과시 3분의 2의 동의를 요구하도록 한 국회선진화법을 교묘하게 악용해 성장과 갈등해소를 위한 박근혜정부의 모든 정책적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

여야 모두 강경파만 득세하고, 온건한 합리주의자들은 설 땅이 없어지고 있다. 국회가 갈등을 해소하기는 커녕, 갈등을 확산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정치는 완전히 실패했다. 조폭집단의 행태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 사회학계 원로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정치권의 양극화를 해소하기위해선 온건합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제3당의 창당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아니면 각 의원들마다 거수기를 지양하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음은 송복 명예교수가 29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14 정치실패 종합토론회:정치실패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 주제발표한 내용이다.    

1. 한국정치. 무엇을 실패했는가

정치의 고전적 목적은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의 증대다. 왜 정치인을 필요로 하고, 정치인으로 하여금 정치를 전담(專擔)하게 하느냐. 그것은 오로지 국가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국가이익을 다른 그 어떤 나라 어떤 집단 어떤 개인의 이익에 우선해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국가안보 국가이익은 국가의 존재이유이며 동시에 정치의 존재이유다.

왜 국민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에 바치느냐?  왜 우리 국민은 자기 천부의 권리를 양도해서 국가권력을 만들어 내느냐? 그 돈 그 권력을 정치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해서 맡아 관리하고 운용하게 하느냐? 그것은 오직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을 위해서다. 국가안보가 보장되어야 국민은 자기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다. 국가이익이 증대되어야 국민은 경제생활과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 생산과 소비 성장과 분배 지식의 발달 문화의 융성은 모두 이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에서 연원한다.

정치의 현대적 목적은 성장의 지속과 갈등의 해소다, 고전적 목적보다 이 목적은 국민 개개인의 피부에 와 닿는, 보다 직접적이며 보다 구체적이다. 보다 현재적이며 보다 가시적이다. 그래서 고전적 목적의 일반성 포괄성보다 훨씬 리얼하다.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체감하는 것이고, 그것도 내일 모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뤄지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갈망(渴望)은 소망(所望)보다 훨씬 목마르게 애타게 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이고 갈등의 문제다.

성장은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는 필수 요건이다. 세계화의 진면목은 경쟁의 치열성이다. 경쟁에 온 나라 온 국민이 '다 걸기'(all in)하는 것이다. 세계화시대의 경쟁은 그 이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차원을 달리하고 과정을 달리하고 결과를 완전히 달리한다. 개발도상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앞서 있는 나라들도 승부를 예상할 수 없고 결과 또한 보장할 수가 없다. 그토록 치열하고 그토록 불확실하다. 역사상 그 어떤 시대의 경쟁보다 치열함이 극에 달하고, 결과의 불확실함이 계측(計測)되지 않는 경쟁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성장의 지속이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런데 한국정치는 성장의 지속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성장의 길을 막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장의 싹 자체를 짓밟고 있다. 대표적 예가 경제 활성화 법안의 법안 상정 저지다.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법안이면 그 어떤 법안이든 논의에서 제외하려 온 힘을 쏟는다. 민생법안도 꼭 그같이 도외시된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어떻게 하면  박근혜정권의 실패를 가져오게 할까하는 것이다. 어떻게 허면 이 정권을 경제적으로 실패한 정권, 성장이라곤 전혀 하지 못하는 정권, 국민으로부터 오직 지탄만 받는 정권, 마침내 나라 발전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 정권, 심지어는 나라를 망친 정권으로 역사에 부각되도록 할까 에만 전력투구한다.

한 정권의 성공은 차기 정권에서의 자기 기회의 상실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국가도 없고 국민도 안중에 없다. 그들은 미래도 오로지 반사이익(反射利益)으로서의 미래다. 그들은 미래를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들 지신의 눈으로 만들려도 안하고 투시하려고도 안한다. 그것이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20년 동안 어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관행화(慣行化)해온 한국 정치인들의 정치 목표며 정치행위의 전부이다.

   
▲ 정치권은 소통과 갈등 해소의 임무와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정치권이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통로로 변질됐다. 새민련은 박근혜정부의 실패만 노리고 있다. 경제활성화법안과 민생법안의 상정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정치실패를 막기위해선 온건중도주의자들이 제3당을 창당해야 한다. 아니면 의원들이 조폭집단같은 당의 거수기가 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의원들이 독립성과 주체성을 갖고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 우윤근 새민연 원내대표(왼쪽)가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만나 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의 숙명(宿命)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갈등은 생래적(生來的 inherent)인 것이다. 생래적인 것만큼 갈등해결(conflict resolution)은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이고, 그것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념갈등 계급갈등, 혹은 인종갈등 종교갈등 문화갈등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상례적(常例的) 갈등이다. 공산주의 전제주의 사회와 같은 폐쇄적 일원적 사회에서는 갈등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갈등의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갈등은 제도라는 장치를 통해 해결해 간다. 그것은 '반드시'라는 용어를 쓸 만큼 반드시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해결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도적 장치를 통한 갈등의 해결이야 말로 첨예한 갈등의 주준을 떨어뜨리고, 갈등해결의 비용을 낮춘다. 갈등은 싸움이며 알력이며 투쟁이다. 이 싸움 이 알력 이 투쟁이 제도 안으로 들어오면 그 정도가 완화되고, 소요되는 비용이 떨어진다. 갈등이 제도 안에서 풀어지면 질수록 그 나라는 선진 국가이고 그 서회는 성숙한 사회이다.

갈등해결의 대표적 제도가 법원이고 의회다. 법원과 의회는 갈등해결을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다. 법원은 고소(告訴)한 갈등을 풀어주는 제도적 장치고, 의회는 고소와 관계없이 벌어진 갈등들을 해결해주는 제도적 장치다. 고소하지 않고 벌리는 싸움들은 거의 모두 정치적인 것이고, 따라서 의회라는 제도 내에서 벌리고 다투는 싸움들은 거의 모두 정치적 갈등이다. 의회기능의 가장 큰 몫 중의 하나가 이 정치갈등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의회는 갈등을 해결해주는 장소가 아니라 거꾸로 갈등을 만들어 내는, 그것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아주 첨예화되고 심화(深化)된 갈등을 양산(量産)해 내는 갈등 진원지, 갈등 생산지가 되어 있다. 그래 아니라도 우리나라는 고소하지 않고 벌리는 정치 갈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많은 나라다. 밤낮없이 싸우는 여와 야, 종북(從北)과 반북(反北), 회사와 노조, 전교조와 대척(對蹠)에 선 일반 교사, 심지어는 대기업 오너 가족과 묶음이 안 되는 일반 국민들 등, 이루 헤일 수가 없다. 거기에 국민세금을 받고 국민 분열을 책동하고 조장하는 의원들이 거꾸로 갈등창출자라면 그 나라 정치는 어떻게 되는가. 정치실패는 불문가지다.
 

2. 한국 정치, 왜 실패 하는가

한국 정치의 실패는 진영(陣營)을 구축(構築)하고 진영 행위 진영논리를 벌리는데서 비롯된다. 지역갈등 계급갈등 이념갈등 등. 각 갈등의 이해 당사자들은 지금 모두 이 진영을 구축하고 있다. 마치 군대의 병영처럼 그들은 캠프(camp)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켐프, 진영을 세워 그 진영에 편입됨으로써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 문화적으로 확연히 구분된, 대립적이며 대항적이며 심지어는 적대적이기도 한 세력이 그들 간에 형성된다.

현대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아지트(agitpunkt)가 바로 그 같은 것이다. 아지트는 진영을 만들기 전의 본부이고 진영을 만든 후도 핵심(core)이다.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그들 운동 그들 활동의 지령본부가 아지트이고, 그들의 구호 그들의 선언문, 그리고 모든 선전 선동 콘텐츠 생산지가 아지트이다. 일단 그 아지트 속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아지트 맨(agit man)이 된다. 그 아지트에서 내리는 지령에 완전히 구속되고 만다. 다른 사고와 행동, 다른 주장과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집단 속박성 집단 강박성의 포로가 된다.

이런 ‘진영행위’의 특성이며 특징은 ’강경‘(强硬hard line)이다·. 그래서 진영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강경하고 진영에서 일어나는 행태 또한 언제나 강경하다. 어떤 갈등 당사자들이건 일단 진영을 형성하면 강경파(强硬派 the hard liners)가 득세한다. 강경파가 중도 · 온건파(the moderates)를 누르고 권력을 잡는다. 진영은 어김없이 강경파들의 세상이 되고 강경파 천국이 된다. 설혹 내가 중도 지향을 해도 강경파들의 그 드센 주장, 강경파들의 그 강경한 노선으로 기웃해지고, 설혹 내가 온건파들을 더 선호해도 강경파들의 그 세찬 기세와 강경파들의 그 험한 눈길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강경파들은 그들의 생각 그들의 행동이 강경한 것만큼 세고 강하다. 러시아 혁명의 볼쉐비크들처럼 그들은 수가 적어도 훨씬 세고 훨씬 공고한 결집력을 갖는다. 그들의 단합 단결력과 거기서 뿜어 나오는 투쟁력을 중도파며 온건파들은 당해낼 수가 없다. 거기에 볼쉐비크들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투사며 전사들이나 진배없다. 싸우는 데는 이력(履歷)이 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의견과 상충하면 해머로 의사당 문도 부술 수 있고, 의사당 안으로 최루가스도 얼마든지 뿌릴 수 있다. 선량(選良)이라는 지위에 올라도 볼쉐비키크들같은 폭력성을 생리적으로 갖고 있다.

그에 반해 중도 온건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대개 지적이고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어떤 문제 어떤 정책이든 지적이며 논리적인 토론과정을 통해 풀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상대를 만났을 때 힘을 내고 효과를 얻는다. 그런 상대가 아닐 때는 그들은 아무것도 생산해 낼 수가 없다. 상대는 그런 지식 그런 논리며 이론에 전혀 귀를 기우리지 않기 때문이다. 강경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들은 자기 소리만 듣고 자기 의사, 자기 주장만 주장한다. 상대의 소리는 소리로 듣지 않고 상대의 의견은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도 온건파들은 합리적으로 자기들 의견을 설득하다 전혀 비합리적인 주장과 장벽에 가로막혀 마침내 스스로 지치고 스스로 꺾이고 만다. 더구나 중도 온건파들은 단결력이 없다. 단결 단합은 처음부터 그들의 생리가 아니다. 이 또한 강경파를 득세 시키는 이유이고 강경파를 더 강경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한국정치는 이 강경파들의 극단 행위로 양극화 되고, 그리고 정치의 양극화 정치의 실패를 자초해 왔다.

3. 한국 정치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정치,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정치가 정치가 되도록 정치 본래 기능을 찾도록 할 것인가. 2개의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의 양극화를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원이 자율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첫째로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대한민국 헌정이 시작된 이래 사실상 계속되어 왔다. 이유는 헌정 이래 의회 정파끼리 진영을 만들어 강경파 득세의 정치를 해 왔기 때문이다. 진영은 진영논리 진영생리가 있어 진영 생태계(生態界)에서의 강경파는 초강경파로 전화되어 마침내 극단적 강경파가 의회를 장악하는 정치 양극화현상을 늘 초래하는 것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정치는 강경파가 권력을 잡으면 정치판은 싸움판이 된다. 정치는 없어지고 정치 투쟁만 계속된다.

정치는 토론이고 소통이고 타협이고 협상이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크고 작은 갈등들이 해소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적대감 내지 의견 대립이 풀어진다. 그리고 타협과 협상이 이루어져 민생법안 경제 활성화 법안들이 생산된다. 그러기 위해선 강경파가 정치전면에서 물러나고 온건파 합리적 중도파가 정치의 중심에 서야 한다. 온건파 합리적 중도파만이 토론의 장을 만들 수 있고 정책적 타협과 협상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중도 온건파들이 어떻게 정치의 중심에 서도록 할 것인가이다. 그것은 중도 온건파의 제 3당이 선거과정에서 만들어지든가, 아니면 여야 양당내의 중도 온건파들이 의안(議案)에 따라 서로 손을 잡아서 강경파의 득세를 막든가 하는, 둘 중 하나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는 그 어느 것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유권자들이 제 3당을 이 색도 저색도 아닌 회색(灰色)지대로 보는 습성이며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3당의 존립이 가능하지 않다면 의원들 스스로 독립성과 자율권을 갖도록 분투해야 한다. 지금 우리 의원들은 정당의 하수인, 정당이 정한 정책의 거수기가 되어 있다. 만일 의원들이 주체의식을 갖고 당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거나 자율권을 행사하려 하면 당으로부터 징계당하고 그리고 당으로부터 다음 공천을 받아낼 수가 없다. 우리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보면 국민의 선량(選良) 엘리뜨가 될 만큼 모두 똑똑하다. 개인적으로 어느 국회의원도 못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왜 우리 정치는 실패하는가.

이유는 우리 정당이 조폭집단과 대동소이한 비민주적인 정당제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당대표자리를 노리는 후보들의 싸움이 조폭집단의 행태와 차이가 없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 같은 비정치적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권자가 중도 온건의 제 3당을 만들어 주거나, 유권자가 투표해 준 의원들이 주체의식을 갖거나, 오로지 이 둘 뿐이다. 이 둘 중 그 어느 것도 안 된다면 한국정치는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일 뿐이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